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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체화된 인지주의’,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하다
서양 ‘체화된 인지주의’,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하다
  • 김봉억
  • 승인 2022.04.1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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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첨단연구의 현장 ‘체화된 마음 연구’ ⑥ 유학의 심신론과 체화주의 

 

오래전부터 동양철학에 제기되어온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는 동양철학의 현대화와 그 시대적 의의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동양철학의 현대적 재구성과 관련된 문제로서 동양철학이 그것의 시대적 제약과 한계를 넘어서 현대적 삶의 조건들과 가치들을 메타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 실제적인 문제점들을 통찰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과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는지와 직결된다. 

최근 서양에서는 ‘체화된 인지주의’, 또는 ‘체화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그 주요 목적은 새롭게 부상하는 인지과학 계통의 연구 성과와 방법론을 토대로 과거의 전통적인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가치론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데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일부 연구자들이 체화된 인지의 전형으로 동양철학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러한 체화된 인지의 관점에서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최근에 국내의 연구자들도 점차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여 동양의 문화, 심리, 철학, 의학 등을  다양한 체화주의의 시각과 방법에 근거하여 그 현대적 가치와 의의를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들을 감안할 때 현재의 흐름과 방향을 되짚어보는 일은 향후 동양철학과 체화주의의 결합과 연착 가능성을 사전에 점검하는 성찰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이번 연재에서는 주로 유학과 체화된 인지의 상호 결합 및 그 향후 전망의 가능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체화된 마음 연구’ 여섯 번째는 ‘유학의 심신론과 체화주의’를 주제로 박길수 강원대 교수(철학과)와 유권종 중앙대 교수(철학과)가 만났다. 

박길수(이하 박):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요즈음 학계에서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이 다양한 분야에서 점차 성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렐라(Francisco J. Varela)나 톰슨(Evan Thompson)이 새로운 철학적 모델로 행화주의(enactivism)를 제창하고 그 이상적인 모델을 동양철학과 연관시켜 논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각과 방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유권종(이하 유): 일단 박 교수님의 질문이 너무 광범위해서 그 범위와 초점을 먼저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렐라와 톰슨이 공동 저술한 『몸의 인지과학』에서 말한 동양철학은 주로 티벳 불교입니다. 바렐라는 그가 직접 불교 수행을 하면서 경험한 내용을 그의 인지과학 연구의 길잡이로 삼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적 수행을 통해 경험의 구조가 형성되고 변화하며 발전하는 것을 바탕으로 불교의 궁극적 체험과 인지과학 연구 결과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불교의 중관학파에서 말한 공(空)의 체화를 위한 수양법을 인지과학의 연구 성과 및 방법에 근거하여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타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 물론 선생님께서 말씀대로 동양의 체화주의에 대한 그들의 1차적 관심은 불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렐라의 독특한 개인적 삶의 여정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이러한 시각과 방법은 단순히 불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또한 유가와 도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특히 유학의 경우 비록 구체적인 사상과 방법론에서 각 시대와 학파에 따라 차이가 존재하지만, 유학의 심성 및 지행 이론은 공통적으로 ‘체인(體認)’, ‘체화(體化)’, ‘체득(體得)’, ‘체찰(體察)’, ‘체당(體當)’ 등으로 표현되는 체화된 인지를 추구합니다. 최근에 슬링거랜드(Edward Slingerland)는 그의 저서 『과학과 인문학』에서 체화주의의 본질적 성격을 ‘문화의 신체화’로 규정하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맹자(孟子)를 들기도 하였습니다. 

유: 사실 유학의 심신과 지행 이론이 현대의 체화된 인지주의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학과 관련해서는 바렐라가 그의 저서 『윤리적 노하우』에서 언급한 것이 전부인데, 그는 거기서 단지 그의 구성주의(enactivism)에 부합하는 맹자의 사상을 도출하여 그의 윤리적 노하우 개념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가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과 유학으로부터 그의 작업의 새로운 지혜를 얻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선 유학과 그의 구성주의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는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문제는 이미 완결된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향후 연구자의 관심에 개방되어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 제가 알기론 선생님께서는 학문의 세부 전공은 한국철학이지만, 오랫동안 동아시아 철학의 현대화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 현대의 마음 이론과 인공지능 이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바렐라의 초기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윤리적 노하우』를 직접 번역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 『윤리적 노하우』는 바렐라가 이태리 볼로냐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편집하여 출판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노하우(Know-How)와 노홧(Know-What), 두 번째 주제는 윤리적 숙련에 관한 것, 그리고 세 번째 주제는 비어있음의 체화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는 평소 성리학의 마음 이론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구성주의적 관점을 접하고는 이 방법이 창조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1999년이었는데, 당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성리학의 마음 이론을 미국의 분석철학의 틀을 적용하여 설명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방법으로는 유학이나 성리학의 마음 이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이 당시 저는 인공지능 연구자와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을 구현할 때 가장 설득력을 갖춘 이론이 바렐라의 구성주의라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이 책을 번역한 목적은 바렐라의 강연 취지와 일치합니다. 그가 윤리적 노하우를 강연한 목적은 서구에 만연한 윤리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서구의 사람들은 윤리적 선악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정작 실천적 행위가 결여되어 사회를 타락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궁극적 원인을 현실적인 윤리 교육이 주로 노홧(know-what)에만 치우쳐서 실제 행위를 촉발하는 노하우를 소홀히 한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적 모델을 동아시아의 유교, 불교, 도가의 사상에 내포된 윤리적 노하우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책을 번역한 목적은 기본적으로 동양 철학 연구에서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을 모색하려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윤리에 관한 현대의 허무주의를 탈피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을 학계에 확산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박: 선생님께서는 바렐라의 체화된 인지주의를 구성주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조가 유행한 기간이 매우 짧으므로 아직까지 명확하게 통일된 용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체화된 인지’, ‘체화주의’, ‘체험주의’, ‘발제주의’, ‘창제(주의)’, ‘행화(주의)’ 등 매우 다양한 용어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그

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가족 유사성 개념군의 배후에는 공통적으로 ‘창발(emergency)’, ‘자기생성(Autopoiesis)’, ‘자기조직(self-organization)’과 같은 신경생물학이나 면역학에서 다루는 주요 내용들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범주들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미시 차원에서 관찰되는 것이어서 그 내용과 논리가 거대한 유기체를 전제로 한 고등 유기체, 또는 거대 유기체의 통일적 행위로 표현되는 인지 과정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유: 제가 사용한 구성주의는 바렐라의 ‘enactivism’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이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번역어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enactivism은 인간 생명시스템 전체의 작용과 효과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입니다. 단지 행동에 의한 변화나 인지의 신체화에 국한하여 번역하면 그 의미가 지엽으로 축소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성주의도 constructivism과 차별화가 안 되어서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죠. 그렇더라도 그게 그나마 적당해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오토포이에시스가 enaction, 곧 자기구성의 핵심 원리라는 점입니다. 바렐라가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함께 엮은  『앎의 나무』에서 공통으로 창안한 오토포이에시스 이론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이론은 원래 시스템 사고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유기체나 생명체의 일반적인 원리와 속성을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토포이에시스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하고도 의미가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 복잡계에 해당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을 개념화한 것입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명활동은 그 자체가 인지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기체는 애초부터 주위의 환경과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주위 환경과 상호 작용을 통해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구조적 변화가 바로 생물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적 변화의 결과는 ‘적응’, ‘학습’, ‘창발’의 상호 순환으로 지속됩니다. 이 점에서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지능을 가졌다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를 인간에게 확장하여 적용하면 인간의 적응, 학습, 창발의 과정이 곧 체화된 인지의 과정이자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의 수양론이 말한 인격의 다양한 경계는 바로 이러한 심신의 발달과정을 집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박: 아무튼 오늘날 인지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성행하는 체화된 인지 이론은 향후 동양철학 일반 또는 유학을 시대에 걸맞게 재구성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거라는 생각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창조적인 현대화 과정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착수해야 할지입니다.

그리고 체화된 인지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성격을 고려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체의 체험이나 행위에 관한 철학교육의 이념이나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선생님께서는 동양철학이 체화된 인지 이론과 창조적으로 결합할 경우 예기되는 교육적 변화와 가치, 그리고 의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유: 동양철학 또는 유학의 현대화는 매우 거창한 주제이면서 애매함이 가득 찬 작업이라서 그 결과가 곧바로 긍정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교육적 측면에서 유학이나 동양철학을 응용할 수 있는 영역을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은 비교적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동양에서 원래 철학 교육은 예법이나 계율을 준수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기본적인 수양법입니다.

그런데 근현대에 들어 서양의 철학과 인문학의 사변과 논리에 근거하여 동양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관념적 지식을 구축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의 주요 개념과 방법들은 원래 일종의 행위를 전제로 한 시스템적 사고 위에서 형성되었으므로 모든 것들이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 연결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황의 성학십도가 좋은 예입니다. 모두 10가지의 주제로 구성된 이 도설은 성인 군주를 양성하기 위해서 형이상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경전의 내용들과 유교의 주요 이념에 대한 인지를 추구하되 그것들은 곧 일상에서의 심신 수양과 예의 학습과 실행에 의하여 지지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보여줍니다. 10건의 도설들에 담긴 유교의 다양한 방법들을 성학의 단일한 체계로 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의 체화된 인지 이론도 인간의 인지 내용과 발달 과정을 생명의 전체 활동의 과정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지를 뇌의 활동으로 환원하여 설명하지 않고, 몸 전체를 하나의 연결망으로 보아 마치 함께 춤추듯 작동하면서 전개하는 생명 활동의 과정이나 내용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화된 인지는 필연적으로 환경과 상관적 결합을 통해서만 특정한 내용을 지닙니다. 이 경우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일상에서의 실행, 혹은 습관화 내지 의례화라는 과제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개념적 지식의 정리와 축적에 머물지 않고 윤리를 비롯한 실생활에서의 경험 축적과 재귀적인 과정의 연속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진전을 통해서 사람은 삶의 여러 방면의 적절한 방식을 원만하게 마스터하는 지혜로운 존재가 된다고 보는 것이 그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의 본질을 파악하고, 나아가 동양철학의 현대적 연구 및 교육을 위한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체화된 인지 이론의 연구 성과와 방법론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검토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길수 강원대 교수(철학과)
고려대 철학과에서 석사를, 중국 베이징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 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현재 한국양명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전공은 송명 성리학이며, 최근 동양 전통 철학의 현대화 문제와 관련해 철학상담치료 및 체화된 인지 이론의 융합 가능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감정의 도덕심리학적 고찰』, 『동·서東·西 철학상담 10강』이 있고, 최근 논문으로는 「육구연의 학문사변 및 격물치지 공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왕양명의 심상 체인의 특징과 의의」등이 있다. 

유권종 중앙대 교수(철학과)
고려대에서 동양철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했다. 현재 중앙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예학, 심학, 융합적 연구방법이며, 주요 저서로 『한국유교도상의 역사』, 『성리학 심성모델과 유교 예교육』 등이 있다. 최근 논문으로 「삶의 건전성 확보를 위한 의학-철학 통합 패러다임 모색」, 「한국철학사연구-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에 의한 검토와 모색」, 「유교의 방법론과 인지과학의 소통 가능성」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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