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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의 평양 활동 복원…그는 서예가 ‘동우 김관호’가 아니다
천재 화가의 평양 활동 복원…그는 서예가 ‘동우 김관호’가 아니다
  • 최익현
  • 승인 2022.04.07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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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시선_ 서양화가 김관호에 관한 어떤 재해석

배원정의 논문은 ‘민족주의 대 친일’이라는 이항대립적 구도로 근대미술사에 접근했던 데서 탈피해, 
좀더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 지평을 확장하자는 것으로 읽힌다.

1945년 무렵의 김관호

한 사내가 있다. 1890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16년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를 수석 졸업했다. 졸업작품인 「해질녘(夕ぐれ)」으로 제10회 일본 문부성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도쿄에 체류하고 있던 춘원 이광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 곧장 〈매일신보〉에 「東京雜信-문부성미술전람회기」(1916.10.28., 10.31.)를 기고, “군(君)이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인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음을 감사하노라”라며 감격에 찬 수상 소식을 전했다. 한국 근대 서양 화단, 특히 평양화단을 대표했던 김관호(金觀鎬, 1890~1959)다. 

김관호는 고희동에 이은 한국의 두 번째 서양화가이자, 양화의 전통이 전혀 없던 시절 서양화 도입기에 파격적으로 나체화를 그리고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던 한국 근대 서양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술사적으로 몇 가지 대목에서 원점을 맴돌아 연구사적 진전이 더뎠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있는 배원정의 논문 「김관호(金觀鎬, 1890-1959) 행적의 새로운 고증과 제 문제」(〈미술사학보〉 제57집, 미술사학연구회, 2021)는 김관호를 둘러싸고 풀리지 않던 전기적 측면을 규명하는 한편, 간 학문적 근대미술사 연구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히는 글이다. 

배원정은 “김관호는 한국의 근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의 서양 화단을 설명할 때 개설적인 성격으로 잠깐씩 언급된 정도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1990년대의 연구 성과에 머물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된 데는 ‘한정된 자료와 정보로 인해 김관호의 생애사에 대한 왜곡된 소개’가 크게 작용했으며, 이러한 왜곡된 소개가 이후 김관호 연구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는데, 특히 서양화가 김관호가 말년에 많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는 내용이 정설화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유족 구술채록 등 전기적 복원 충실

그렇다면, 배원정은 이러한 한계와 불분명한 추측성 오류를 어떻게 고증하고 재해석했을까. 먼저 김관호의 전기적 측면과 관련, 2019년 김관호의 서거 60주년을 기념해 김관호의 무덤이 열사릉으로 이전된 이후 북한 내에서 새롭게 쓰이고 있는 김관호의 평전과 김관호 유족의 구술채록 및 인터뷰, 여러 신문자료 등을 기반으로 김관호의 생애와 행적들을 새롭게 고증하고, 김관호가 주도했던 삭성회에서의 활동, 근대 평양 서양 화단의 전개와 맞물린 김관호의 절필 이유 등을 재조명하면서 김관호를 둘러싼 현재까지의 인식과 평가들에 대한 제 문제를 검토하는 방식을 취했다.

두 번째는 불분명한 추측성 오류 즉 ‘서양화가 김관호=서예가 동우(東愚) 김관호’라는 도식을 넘어서기 위해 『대한제국관원이력서』(국사편찬위원회 엮음, 탐구당, 1971)와 『창원김씨세보』를 샅샅이 뒤지는 발품을 팔았다. 

이 과정에서 배원정은 김관호 작품의 새로운 측면도 확인했다. 김관호는 1915년 유학 시절 제 3회 일본 국민미술협회전에 참가해 「교실에서」와 「천변」을 출품했는데, 그가 전람회에 출품한 첫 작품 「교실에서」는 파스텔화였다는 것. 서양화가로서의 김관호의 궤적이 좀더 구체화하는 장면이다. 

일본 문부성전람회에서 특선에 오른 「해질녘」(캔버스에 유채 127.5 × 127cm, 1916), 도쿄예술대 소장. 

소설가 김동인이 ‘천재’라고 인정해줬던 김관호는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 정착하지만, 10여 년의 화단 활동을 끝으로 ‘절필’을 선택하고 말았다. 배원정은 김관호가 미술보다는 사업에 전념한 것은 틀림없지만, 세간의 소문처럼 목재상이나 정미소를 운영한 게 아니라 평양의 오노다 시멘트 분공장(원래의 공장에서 갈라져 나온 공장)을 경영하면서 사업가로 활동했다고 특정했다. 절필 이유에 대해서도 기존 연구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김관호는 1925년 7월 김찬영, 김광식, 김윤보 등과 함께 수업 연한 2년의 미술 교육기관 ‘삭성회회화연구소’(이하 삭성회)를 개원했는데, 미술 후진양성에 주력하겠다는 의지였다. 김관호의 절필 이유 가운데 하나로 거론돼왔던 것이 바로 이 ‘삭성회 미술학교 승격 운동’의 실패였다.

배원정은 ‘삭성회 미술학교 승격 운동의 실패’ 역시 일제의 탄압에 의한 것이 아닌, 일신학교와 진명여고 출신들의 학교 보존부흥 운동과 결부된 좌절로 설명했다(이와 함께 그간 모호하게 알려져 있던 삭성회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들을 면밀하게 추적함으로써 1928~29년경 해산된 것으로 알려져 왔던 삭성회가 1931년까지 존속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단편적인 오해들도 바로잡고 말년의 삶도 밝혔다. 즉, 삭성회 출신들이 결성한 단체로 알려져 있던 평양양화협회는 평양고보 도화 교사인 니노미야 후지마로(二宮不二麿)가 중심이 되어 이끌던 단체였으며, 삭성회 출신의 조선인 화가들이 만든 미술 단체는 청도회·오월회였다고 바로잡았다.

이후 김관호는 뚜렷한 미술 활동 없이 일상인으로 지내다가 1950년대 중반 북한 미술에 재등장해, 「모란봉」, 「해방탑의 여름」 등 다수의 작품을 그렸는데, 특히 9점은 현재 평양조선미술박물관에 국보로 지정돼 소장 중임을 확인했다. 

민족주의-친일 구도 접근, 미술사의 다양성 못 읽어

무엇보다 ‘동우 김관호’와 서양화가 김관호가 동명이인임을 밝힌 것도 이 논문의 미덕이다. 배원정은 지금까지 김관호의 호로 알려져 있던 ‘동우’는 대한제국 궁내부 사무관이었던 동명이인의 김관호(金觀鎬, 1863~1934)였음을 밝혀냈다.

다섯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다양한 서지에 등장하는 ‘동우 김관호’와 통교하는 이들의 연배가 서양화가 김관호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둘째, 서양화가 김관호는 자신의 작품 어디에도 ‘동우’라는 아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K.K라는 머리글자만 사용했다. 셋째, 1927년 9월 18일 자 〈조선일보〉에 유방 김찬영, 일재 김윤보, 농부 김광식을 차례로 거론하다가 김관호를 ‘매원(梅園) 김환호’로 적시한 기사도 찾아냈다. 넷째, 자서전 『서화백년』에서 이당 김은호가 김관호를 지칭할 때 그의 호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음을 들었다. 다섯째, 『대한제국관원이력서』와 『창원김씨세보』를 교차 확인한 결과, 이 세보에 기록된 ‘김관호’의 자는 ‘광여(光汝)’, 호가 ‘동우(東愚)’임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동우 김관호’와 서양화가 김관호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 이는 지금까지 서양화가 김관호의 절필 이유로도 소환됐던 ‘민족주의적 성향’ 부분도 수정될 필요가 있다. ‘동우 김관호’가 민족주의적인 글을 다수 남겼다는 사실로부터 서양화가 김관호가 “일본에 굽히기 싫어 붓을 꺾은 것”이란 설명이 성립될 수 있었는데, 배원정은 향후 김관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모색하고, 또 다른 동우 김관호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도 이 부분은 시급히 수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북한에서 그를 가리켜 ‘애국지사’로 평가하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민족주의 대 친일’이라는 이항대립적 구도로 근대문화사에 접근했던 데서 탈피해, 좀더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 지평을 확장하자는 것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배원정의 논문은 의도했든 아니든, 한국의 근대 예술 연구가 매우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환기한다. 예컨대 김동인이 도쿄에서 1919년 2월 창간했던 잡지 〈창조〉의 창간 동인에 ‘서양화가 김관호’가 들어 있었다는 것, 이 〈창조〉의 후신 격인 〈영대〉에도 ‘서양화가 김관호’가 창간 동인으로 함께 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국문학자인 김선풍이 서예가인 ‘동우 김관호’의 「혈죽가」를 서양화가 김관호의 것으로 오인해, 그가 일제 탄압에 못 이겨 화단을 떠났다고 추측한 논문을 발표(1993)하고, 다시 미술계로 수렴된 불확실성의 재생산 문제도 이참에 극복해야 한다. 나아가 해방정국 이후 남북분단 상황에서 북을 선택했던 문인, 화가들의 선택 행위와 함께 그들의 예술에 나타난 공통분모를 찾는 ‘간 학문적’ 연구도 좀더 깊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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