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8:50 (수)
공약과 정치
공약과 정치
  • 신희선
  • 승인 2022.04.04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딸깍발이_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

“새 정부는 역사적 소명을 다한 여가부를 폐지하겠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대선 당시 후보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공약 중 하나였다. 여가부를 왜 폐지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나 설명도 없이 ‘일곱 글자’만 내걸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공약’에 따라 여가부는 무조건 폐지한다고 발표하였다. 여성단체들은 공약을 철회하라며 거리로 나섰다. 후보시절 내세웠던 구체적인 공약을 둘러싸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과의 약속인 공약을 지키려는 자세는 중요하다. 그러나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타협과 설득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부처가 폐지되거나 정권교체를 이유로 이전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들을 원점으로 되돌린다면, 과연 국민 통합의 새 정치가 가능할까?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눈 얘기에서 20대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젠더 혐오를 재생산하는 장”이었다고 하였다. 20대 남녀를 갈라치고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는 당선인의 말은 디지털 성범죄를 비롯해 여성들이 경험하는 위태로운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들의 높은 대학진학률과 사회 진출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여성고용률과 고위직 임원 비율이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통계는 엄연한 사실이다.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를 열면 ‘일상의 평등’을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여가부 폐지 공약을 둘러싼 지금의 논쟁에 국민 절반인 여성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았다. 

0.73% 차이로 승패가 갈린 20대 대선 결과 제로섬 게임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다.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고 했지만 제왕적 대통령의 조짐이 보인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 이전을 둘러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당선인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기보다 “정부를 담당할 사람의 자기 철학에 따른 결단”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권력을 쥔 한 개인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합의를 위해 노력하는 문제해결 과정에 있다. 마이클 샌델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겸손’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정치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다양한 의견이 서로 부딪치며 논쟁하는 가운데 국민을 위해 무엇이 더 나을지, 최종 결정하는 자리가 대통령이다. 과정이 사라진 정치는 권력의 폭력이 될 수 있다. 공약으로 내세웠어도 반대 여론이 높다면 이를 경청하고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현실 정치의 장에서는 유연함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미니 부처인 여가부를 공약에 따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과 인력을 보강해 일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성평등한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결정이다. 대통령의 새 집무실을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하기보다 강원도 산불로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가슴이 새까맣게 타버린 이재민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코로나 확산으로 지쳐 있는 국민들이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시급한 민생 현안에 예비비를 사용하는 것이 청와대 이전 공약을 지키는 것보다 국민과 더 소통하는 정치다. 

“공격적인 방법 말고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미국 드라마인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s)」에서 대통령이 된 주인공이 한 말이다. 그는 테러로 인한 비상사태로 엉겁결에 대통령직을 맡은,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힘과 권력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정직과 진정성으로 대통령의 정치적 권위를 만들어 나갔다. 드라마 속 대통령 연설비서관은 “국민을 통합하는 말을 찾고 있다”며 지정생존자가 과거에 학회에서 했던 말을 인용해 신임 대통령의 첫 메시지로 내놓는다. 지지부진한 기존 정당을 넘어서 대통령의 철학이 담긴 새로운 정치가 그 말로 시작되었다. “우린, 국민의 길을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