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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구운몽’의 욕망···여성의 재현 이미지
[디자인 파노라마] ‘구운몽’의 욕망···여성의 재현 이미지
  • 조현신
  • 승인 2022.04.08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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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⑫_조현신 국민대 교수

가상공간의 확장과 더불어 인공지능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 뉴욕 패션쇼에는 LG가 개발한, 6천억 개의 말뭉치를 지닌 인공지능 디자이너 ‘틸다’가 등장했다. 그녀는 ‘금성에 핀 꽃’ 콘셉트로 캣워크를 주도했다. 오는 14일에는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에서 가상 가수 ‘유나’가 라이브 공연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 인물들이 대부분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점 때문에 학계에서는 만만찮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경영계 측에서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시장 제일주의의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하지만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여성이 전문가로 사회에 등장한 근대기 초에 부여받은 비서, 엔터테이너, 조력자 등의 이미지가 가상공간에서 반복되는 성 불평등 결과라는 연구를 내놓는다. 그럼 여성들은 어떻게 가시적 역사의 장으로, 어떤 재현된 이미지로 등장했는지, 그 근원을 한국 근대기를 통해 잠깐 살펴보자.

 

신소설 『홍도화』 표지. 사진=현담문고
신소설 『홍도화』 표지. 사진=현담문고

사회의 표면으로 호명되는 여성들

조선 여성의 초상화 기녀를 포함해 10점이 채 안 되며,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대비라고 추정되는 한 점이 조선의 유일한 왕족 여인 초상화라고 한다. 총 48점이 남아있던 어진(御眞)의 숫자와는 판이하게 대비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양과도 비슷해서, 전통기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사라진 사람들(Omitted People)’로 명명되었다.

근대의 물결은 이러한 존재감 없는 여성을 가시적 역사의 장으로 호명하기 시작해, 조선 여성들도 이미지를 부여받으며 인쇄물에 등장했다. 1906년 유일선, 주시경, 장지연, 신채호가 참여한 최초의 여성지인 『가뎡잡지』의 창간호 표지에서 여성은 맹자를 키워낸 어머니 역할로 등장한다. “어진 부인의 자식 교육하던 일과 살림살이하는 사적을 기록하고 또 신학문의 긴요한 사상을 논의하…”라는 발간 취지에 맞는 세팅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국충정의 남성 계몽가들이 여성에게 투사한 이미지가 선명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정교육만 담당하던 여성들은 곧이어 신소설에서, 즉 상업적 목적하에서는 좀 더 흥미를 자극하는 이미지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신소설 표지 속에서 여성은 납치당하고, 성 노리개 역할을 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고, 투신자살을 하거나, 피살되는 극적인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또 한편, 이 대응점에는 드물지만, 신학문을 배우러 떠나고, 자아를 깨달아 가는 여성상이 펼쳐진다.

이해조의 신소설 『홍도화』(1908, 동양서원)의 표지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관재 이도영의 작품이다. 주인공 이태희는 신교육을 받고 싶은 열망이 있으나, 얼치기 개화꾼인 아버지 이직각의 이기성과 고루함으로 몰락한 수구파 양반집으로 시집을 가야 할 운명이다. 이태희는 이런 생각을 한다. ‘개화된 세상에는 양반은 쓸데 없고 남녀 막론하고 학문이 넉넉해야 상등인이 된다는데, 나를 왜 공부도 못하게 시골구석으로 시집을 보내려 하시노?’ 하지만 결국 시집을 가야 했고, 남편이 죽은 후 과부로 살면서 죽을까 하다가 개가하면서 현실을 헤쳐나간다. 표지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산골 풍경 속에서 손을 턱에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저 뒤편으로는 한 쌍의 제비가 분홍 복사꽃이 핀 산골의 봄을 희롱하듯 날고 있는데, 흐르는 냇가에 방망이질하던 빨랫감은 내팽개쳐져 있다. 이 여인은 주어진 현실을 거부하고 사회와 맞서며 자신의 존재성과 욕망을 관철하려는 근대적 여성상의 모체로 해석할 수 있다.

 

왼쪽부터 『신여성』 창간호 표지,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 서울시 2017년 홍보 포스터, 잡지 『장한』 표지.  사진=현담문고, 근대서지학회, 서울시, 근대서지학회(왼쪽부터). 

반복되는 역사적 기시감

이러한 여성 이미지는 이후 개벽사가 창간한 여성잡지에서 반복된다. 1923년 발행된 『신여성』 창간호의 경우에는 신세계를 상징하는 미지의 바다를 배경으로 꽃을 한 송이 들고 그것을 바라보는 여성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하이힐을 신고, 신식 머리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한복이다. 1년 뒤인 1924년 9월에도 역시 한복을 입은 여성이 바다를 배경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홍도화』 표지 속 여성과 비교하면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바뀌었으나 포즈는 여전히 어설프다. 이런 여성상은 1930년대 들어 과감하게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는 모던걸, 프레파 등의 용어로 불리는 이미지로 다시 분화된다.

이런 대중소설 표지 속의 여성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흔하게 발견되는 재현 이미지는 엽서 속의 기생들이다. 기생엽서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국가 행사에까지 사용됐다. 일본이 한일합방(경술국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15년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 포스터는 1914년 일본 다이쇼 박람회 포스터를 모방한 것이다. 포스터 속의 나비 눈썹을 한 표정 없는 여성은 조선시대 미인도나 풍속화에 등장하던 여인이다. 그는 이제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정치적, 상업적 목적을 위해 더 광범위해진 스케일의 관음증적 대상으로 세팅된 것이다.

이 포스터는 거의 100여 년 후인 2017년 서울시가 뉴욕에 게시하려던 홍보 포스터와 기시감을 유발하는 것으로 거론된다. 머리를 틀어 올린 육감적인 여성이 화면을 가득 메운 이 홍보물에 대해 한복의 인기에 부합되는 콘셉트라는 제작의 변이 나왔으나, 결국 여성들의 반대 여론으로 게시되지 못했다. 그럼 이렇게 수동적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권번 기생들이 1927년 창간한 잡지 『장한』의 표지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조롱 속에 갇힌 새로 그려내면서, “기생도 사람이니 영원히 한숨과 눈물만 벗으로 삼을 것이냐, 그것을 원치 않거든 마음과 힘을 합하자”라는 창간사를 발표했다. 2호 표지에는 단발머리의 신여성과 한복을 입은 여성이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손을 잡고 마주보고 앉아 있다. 여성들의 단결을 애타게 그리는 이 마음 또한 근래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진행된 성적 갈라치기 속에서 불붙듯 일어난 2030 여성들의 연대와 역사적 기시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가?

 

소설 『사랑』 전편·후편 표지. 사진=근대서지학회
소설 『사랑』 전편·후편 표지. 사진=근대서지학회

성적 갈라치기를 보여주는 인공인물

이런 대중 소설이나 포스터 속의 여성과는 달리 문학서 표지에서의 여성은 좀 더 다른 각도로 그려진다. 이광수의 1938년 소설 『사랑』 표지에 흑백의 절제된 선으로 그려진 주인공 석순옥은 월북작가 정현웅의 작품이다. 근대기 여성 이미지 중 가장 우아하고 정적이지만, 깊고 뜨거운 열정을 품고 고귀한 희생정신과 지성까지 겸비한 여성이기에 이상적 신남성 안현빈의 파트너로 선택된 것이리라.

이외에도 여성들은 마치 『구운몽』의 여덟 선녀들이 모든 직업, 계층의 여성상으로 등장해 남성들의 이상적인 욕망 구현체로 등장하듯이 어머니, 사회주의 전사, 기녀, 소녀 이미지, 『자유부인』의 열정적 불륜녀, 성적 이미지로 상품을 포장하는 마케터의 이미지로 역사의 표면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욕망과 자본, 이념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이미지 제작 권력자들을 창조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2017년도에도 100여 년 전의 것과 동일한 욕망의 싱크로율 100%의 포스터가 탄생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인물 역시 이러한 시스템하에서 탄생하기에 현재 우리는 과학자나 설계가는 남성, 엔터테이너나 조력자는 여성이라는, 성적 갈라치기 인식을 드러내는 인공지능 인물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성 이미지 제작이 권력과 자본을 운용하는 일정 성에 의해 좌우되는 한, 우리 사회의 딸들은 여전히 고통과 분노를 표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과 교수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디자인물에 관심이 많다. 특히 한국의 근대기 시각디자인문화사를 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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