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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품은 몸’으로 변화…'이목구비심'이 다를 수 없다
‘마음을 품은 몸’으로 변화…'이목구비심'이 다를 수 없다
  • 김봉억
  • 승인 2022.03.30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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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 첨단연구의 현장 ‘체화된 마음 연구’ ⑤ 인간, 몸과 몸 사이 : 동양철학과 현대의학의 만남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란, 서양의 근대 문명이 물질로 구성된 몸과는 전혀 다른 실체로 만들어버린 마음이 다시 몸으로 흘러들어 하나인 ‘뫔’으로 되어가는 과정의 한 매듭이다. 17세기 데카르트에 의해 마음에서 분리된 몸은 이어진 과학혁명을 통해 철저히 해부되고 분석되었다. 그 결과 찬란한 과학적 의학의 꽃이 만발했다.

하지만 그렇게 철저한 환원의 끝에서 만난 것은 몸의 궁극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었다. 마음의 장소로 여겨지던 뇌는 마음의 물리적 저장소가 아니라 몸의 다른 부분,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 속 경험이 교차하는 질적 공간이었다. 여기서 마음은 몸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마음은 몸의 관념이다! 심신 이원과 기계적 환원이라는 데카르트적 실천의 끝에서 다시 새롭게 만나는 스피노자의 깨달음이다. 

서양의 과학 문명은 이렇게 긴 우회로를 거쳐 다시 삶의 주인이며 앎의 대상이기도 한 본래의 몸을 만나고 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몸의 사상이었던 노장(老莊)과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몸을 어떻게 알고 살아왔을까? 서양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몸 자체가 실천적 주제였던 의학은 이 두 전통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체화된 마음 연구’ 다섯 번째는 ‘인간, 몸과 몸 사이 : 동양철학과 현대의학의 만남’을 주제로 강신익 부산대 교수(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와 김시천 상지대 교수(교양학부, 동양철학)가 줌으로 대담을 나눴다. 

강신익(이하 강): 노장사상을 몸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지혜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 심신(心身) 이원에서 출발해 체화된 인지로 돌아오는 서양의 흐름과 비교해서 설명해 주시지요.

김시천(이하 김):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마도 1990년대 후반 이래 이에 대해서는 같은 논의가 반복되어 온 듯합니다. 즉 서구적 전통에서 몸에 대해 이원적으로 접근했던 것과 달리, 동아시아 전통에서 이해되어 온 몸은 기(氣)를 중심으로 일원적으로 이해되어왔다는 식이죠.

그런데 이런 대비적 이해가 어떤 구체적인 이해의 증진을 가져왔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예컨대 한의학(韓醫學)의 인체 이해는 현대의학의 인체 이해와 어느 정도 소통을 확보했는지요?
 
강: 역시 어려운 질문이군요. 적어도 서구의 과학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의학의 인체 이해와 한의학의 몸이 ‘학술적 언어’를 통해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서구의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체계로는 한의학의 인체를 설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냥 통째로 무시하거나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기가 일쑤지요.

이런 상황에서 두 의학의 전제가 된 형이상학을 검토하려는 요구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하고, 마음을 뇌로 환원하려는 서구적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 전통에서 다루어진 몸이 달랐던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요?

김: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양-동양을 대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이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원론이냐, 이원론이냐 하는 이 물음 자체의 도식이 ‘서구적’ 관점이지, 동아시아에서 몸을 바라본 시각을 규정하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몸을 표현하는 말들, 신(身), 체(體), 형(形), 기(己)와 같은 한자들이 형성된 맥락을 이원론이냐, 일원론이냐 하고 묻는 것은 엉뚱한 일일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글자들이 포착하는 몸이 어떤 것인가, 라고 먼저 물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강: 그런 지적에는 충분히 동감합니다. 서양의학의 경우로 말하자면, 16세기와 17세기에 해부학과 생리학이 싹튼 이후 줄곧 물질로 구성된 몸의 구조와 기능에만 관심을 두어왔습니다. 마음을 떼어낸 몸은 철저히 물질적 존재가 되었고 마음은 종교나 철학의 영역에 편입됩니다. 19세기에 이르면 미미하나마 심신의학 운동이 일어나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하려고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요.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의학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조짐은 분명 실천적 수준에서 ‘마음을 품은 몸’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봅니다. 

서양의학의 전통적 사유양식으로는 생물학적 효능은 없지만 임상적으로는 확실히 효과가 있는 플라시보(placebo)의 역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최근 뇌 과학을 통해 그것을 설명하려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현상과 존재를 연결할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의학 교육에서도 몸이 작동하는 메커니즘보다 몸의 경험을 중시하려는 흐름이 형성되었고요. 아직 주류 의학에서는 동참하려 하지 않지만, 역사적 흐름이 몸과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김: 저의 경우는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공부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런 문제의식을 여전히 공유하고 있습니다. 서구 과학의 전통에서 몸-마음의 분리가 결국 인간의 몸을 이해하는 데에, 세계와 소통하고, 몸의 건강을 유지하고, 건전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에 여러 가지 장애를 가져오기에,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은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의 틀이 서구적 범주에서 제기된 것을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답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오히려 왜 한의학은 정신(精神)-형체(形體)라는 말이 있음에도 일원론인가,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왜 한의학은 사상(四象) 혹은 팔상(八象)과 같은 인체 분류에 도달하는가, 이렇게 물어야 동아시아 맥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강: 그런 문제 제기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사실 그간의 논의를 보면, 서구 학계에서 벽에 부딪힌 문제들에 대해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어떤 해답을 구하려는 접근이 주류였던 것 같아요. 한의학과 현대의학의 소통이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그간 우리가 물음을 제기했던 맥락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전통이 몸 중심의 사고를 주된 전통으로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예컨대 유학에서 강조하는 수신(修身)이 그렇습니다. ‘몸을 닦는다’는 말이 도덕적 관점과 신체적 관점이 결합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체육과 윤리가 결합된 형태인 것이죠. 체득(體得)이란 말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뇌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중심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물질적 존재로서의 몸(Korper)과 경험과 현상으로서의 몸(Leib)을 구분해 온 전통이 있지만, 여전히 경험의 구조가 크게 다른 건 사실 아닌가요? 

김: 나름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시각에 대해서도 약간의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수신’(修身)이란 말은 심신의 분리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쓰여진 교과서 이름으로서의 ‘수신’은 그냥 ‘도덕’ 교과서의 이름일 뿐입니다. 또 푸코의 시각에서 본다면 ‘수신’은 ‘훈육’(discipline)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오히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체화된’ 이란 말과는 다른 방향에서 동아시아의 ‘인식’과 관련된 생각은 ‘이목구비심’(耳目口鼻心)이 각각 서로 대체할 수 없는 분류(discrimination)를 행하는 기관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동아시아 인식론에서는 오류의 원인을 대상으로부터 오는 정보나 자료의 오류가 아니라 감각기관 자체의 오류나 불충분으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문(見聞)은 눈과 귀에 의한 정확한 인식 그 자체를 의미하고, 그것은 총명(聰明)으로 설명됩니다. 인식의 주체가 몸이냐 마음이냐 라는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강: 공감합니다. 결국 우리가 앞으로 추구할 것은 몸의 생물학적 보편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슬링거랜드(Slingerland)는 심신이원에서 출발해 체화인지로 접근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전통 사상 또한 이러한 이원론을 떠나있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문제의식상으로 역시 서구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말하는 수직적 통합의 관점은 분명 논란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서구 과학 혹은 의학이 몸-마음의 분리로부터 몸으로 수렴되는 것은 중요한 흐름이라 생각합니다. 그 어딘가에서 동서양의 접점을 모색할 수도 있고요.

김: ‘체화된 인지’ 연구는 분명 동양학을 공부하는 저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유익한 용어와 관점을 제공합니다. 교수님께서 제기하신 ‘생물학적 보편성과 문화적 다양성’이란 말 속에 중요한 암시가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의 몸은 개별적 다양성을 갖지만 분명 공통의 구조와 기능들을 갖고 있다면, 문화적 다양성은 결국 그 몸으로 수렴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일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전인류가 공통의 ‘사회’ 혹은 공통의 인식을 갖는 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강: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체화된 인지’ 연구는 우리의 인식 혹은 세계와의 소통이 단지 ‘몸으로’ 들어가 그에 토대해야 된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몸이 관계하고 있는 ‘세계’와의 소통 즉 ‘몸 밖으로’까지 함께 아우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몸이 마음과 분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환경, 세계, 우주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몸은 생물학적 존재일 뿐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고 생물과 문화는 단절이 아닌 연결을 통해 진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이 체화 인지 연구의 중요한 화두가 될 것 같습니다.

강신익 부산대 교수(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제대에서 치의학 박사를 했다. 15년간 치과 의사로 일하다 영국 웨일즈 스완지대학에서 의학 관련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2013년 가을부터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인문학적 의료’를 공부하고 가르친다. 특히 과학적 사실과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연결하고 종합하는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몸의 역사 몸의 문화』, 『몸의 역사』, 『의학 오디세이』(공저), 『생명, 인간의 경계를 묻다』(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공해병과 인간생태학』, 『사회와 치의학』, 『환자와 의사의 인간학』 등이 있다.

김시천 상지대 교수(교양학부)
숭실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동양철학, 특히 중국고대철학과 노장철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지은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논어, 사람을 읽다』,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펑유란 자서전』(공역), 『마이클 샌델, 중국을 만다다』(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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