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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달항아리는 어떻게 성화대가 되었나
[디자인 파노라마] 달항아리는 어떻게 성화대가 되었나
  • 최범
  • 승인 2022.03.24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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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⑩_ 최범 디자인 평론가
평창동계올림픽의 달항아리 성화대(왼쪽), 보물 제1437호 백자 달항아리(오른쪽).   사진=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및 동계패럴림픽대회(왼쪽), 국립중앙박물관(오른쪽)

하얀 스케이트를 신은 김연아 선수가 성화봉에 불을 붙이자 나선형의 도화선을 타고 올라간 불꽃이 성화대 위에 피어오른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성화 점화 장면이다. 불꽃이 타오르는 성화대는 다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백자 달항아리 모양이다. 내 눈에는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머리에 문어처럼 긴 다리를 가진 외계인처럼 보였다고 하면 올림픽에 대한 모독일까. 아무튼 특이한 디자인임은 분명했다.

성화대는 디자이너 김영세의 작품이다. 김영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이노디자인(Innodesign)’이라는 회사를 설립한 사람이다. 나는 예전에 그가 「아침이슬」의 작곡가인 가수 김민기와 서울대 미술대학 동기라는 내용의 기사를 본 것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다. 사실 나는 그가 올림픽 성화대를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던 그의 디자인 성향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노디자인’이라는 회사 이름처럼 김영세는 스타일을 넘어선 혁신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전통적인 모티브의 디자인을 했다는 것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달항아리가 한국의 우아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했다. 물론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는 우리에게도 낯선 인면조가 등장하는 등 전통적인 요소가 많이 동원되었다. 제 아무리 혁신적인 경향의 디자이너일지라도 그런 코드를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기는 한다. 그러면 평창동계올림픽의 성화대 위에까지 올라간 달항아리는 과연 어떤 물건인가.

 

문화적 과정으로서의 전통

사실 달항아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 아이템이 되는 과정은 오늘날 한국인이 생각하는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타자에 의해 발견된다. 그렇게 발견된 ‘한국적인 것’은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 자신에 의해 수용되고 승인된다. 그런 다음 그것은 민족문화의 명부에 오르고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달항아리는 그렇게 탄생했다.

전통은 과거 자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 인식되고 인정된 과거다. 그러므로 전통은 반드시 사후적인 발견과 추체험의 과정을 거친다. 심지어 발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 한국 근대의 ‘의미 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인 일본인의 시선이 개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전통문화 중에서도 고려청자나 조선 백자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다. 그는 민예와 민화라는 말을 만들어내는 등 조선 예술의 가치를 발견하고 정식화하는데 힘썼다.

백자 달항아리 역시 그런 방식을 통해서 그 가치가 발견되고 인정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의 미학자, 미술사가, 예술가들에게 찬양되었다. 특히 김환기(1913~1974)의 회화를 통해서 달항아리는 한국미의 정화(精華)라는 지위로까지 상승했다. 어떻게 보면 한국적 모더니즘의 개척자라고 불리는 김환기가 백자 항아리라는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었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은 소재에서나 형식에서나 탈전통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타자에 의해 발견된 ‘한국적인 것’이 마침내 우리 자신에 의해 수용되어 전통문화가 됐다는 사실이 이상하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정체성이란 언제나 그렇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타자에게 비쳐진 거울 이미지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생각하는 전통의 이미지 역시 예외가 아니며, 달항아리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한국인이 그렇게 자랑하는 달항아리나 막사발의 실체를 우리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달항아리는 현재 2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이 무엇을 담았던 그릇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막사발 역시 그 이름과는 달리 제기(祭器)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뿐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 후손들은 평창동계올림픽의 기록영상을 보고 달항아리가 불을 담았던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전통은 의외로 낯선 것일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들은 전통이라는 것 자체가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도 생성되어가는 문화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디자인을 통해 사회를 읽어내는데 관심이 있으며, 특히 한국 디자인을 한국 근대의 풍경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평론집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 외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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