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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에스토니아 민족 통합 이끌어야 하는 고려인 3세
[글로컬 오디세이] 에스토니아 민족 통합 이끌어야 하는 고려인 3세
  • 서진석
  • 승인 2022.03.17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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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서진석 한국외대 EU연구소 선임연구원
미하일 클바르트 에스토니아 탈린 시장이 지난달 2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얀 포스카 전 에스토니아 외무부 장관 동상에 에스토니아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포스카 전 장관은 1920년 러시아와의 평화조약인 타르투 조약을 이끌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데 공로를 세웠다. 사진=미하일 클바르트 페이스북
미하일 클바르트 에스토니아 탈린 시장이 지난달 2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얀 포스카 전 에스토니아 외무부 장관 동상에 에스토니아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포스카 전 장관은 1920년 러시아와의 평화조약인 타르투 조약을 이끌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데 공로를 세웠다. 사진=미하일 클바르트 페이스북

2019년 4월 11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새로운 시장이 자리에 올랐다. 소련 카자흐에서 에스토니아인 아버지와 고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세 살이 되던 때에 에스토니아로 이주했다. 소련에 의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해야 했던 조부모의 여정만큼 먼 길이었으나 그의 식구들은 여러 사업을 벌이면서 탈린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어머니는 에스토니아에서 소수민족을 대변하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이런 독특한 이력을 자랑하는 신임시장의 이름은 미하일 클바르트(Mihhail Kõlvart)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에스토니아에는 대략 190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소련 시절 에스토니아로 이주한 러시아인들, 혹은 러시아어 사용자들이며 에스토니아 동부인 이다-비루마(Ida-Virumaa)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다. 한때는 이다-비루마를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나 돈바스 지역과 비교되곤 했다. 지역주민 중 대부분을 구성하는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이 이른바 소련 이후 에스토니아로부터 역차별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러시아인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놓여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러시아는 자국민 보호차원으로 그 지역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공공연하게 드러낸 바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물리적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내부적으로는 러시아인들로 대변되는 소수민족들과의 불화가 항상 있었다. 그것은 주로 100년 동안 같은 땅에서 존재해왔던 그들의 기억이 에스토니아의 ‘공적 기억’에서 삭제되거나 강제로 잊히도록 강요당한다는 사실에 대한 집단적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07년 4월 26일에 발생한 청동군인동상 사건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사멸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이 동상은 에스토니아인에게는 러시아인들이 에스토니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산 증거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에 사는 러시아인들에게 이 동상은 그들의 정체성을 수호해주고 결집시킬 수 있는 밑바탕으로 인지되고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던 그 상징물이 시 외곽 묘지로 이전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많은 러시아인이 이에 반대하며 나섰고 거의 폭동과 같은 시위가 며칠간 이어졌다. 단순히 동상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 기억으로 자리 잡지 못하는 그들의 정체성과 기억에 대한 상처가 곪아터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 현재 상황으로서는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상당수의 러시아인이 여전히 에스토니아 사회와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하일 클바르트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의 시장이 된 것은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었다. 클바르트는 러시아어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으며 그의 조부모는 평생 에스토니아어 배우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도 에스토니아 사회에서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고 러시아어 교육을 높이고자 하는 일이 앞장섰던 인물 중 하나다. 어찌 보면 에스토니아가 봉착하고 있는 다양한 인종 문제들을 한데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에스토니아 태권도 협회 회장으로 오랜 시간 일한 배경이 그런 종합적인 딜레마를 혼자서 지고 갈 만큼 강인한 인물로 비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탈린 시장이 되기 이전에도 에스토니아 정치계에서 걸출한 인물로 자리를 잡아 사회적 인지도를 굳게 다진 바 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이제 새로운 딜레마에 봉착했다. 바로 에스토니아인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다.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편입된 직후 전체 인구 중 74.1%였던 에스토니아인들은 독립 이전인 1989년에 61.5%로 떨어졌다. 지금은 약 75%로 다시 올라섰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 해외로 도피했던 해외거주자들이 대거 에스토니아로 돌아왔다거나 출산율 상승으로 에스토니아인의 비율이 다소 높아진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유의미한 수치는 아니다. 기존 정체성의 침해를 다소 감수하고 에스토니아 시민권을 받는 것으로 돌아선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에스토니아에서 수 세기를 걸쳐서 지내온 사람들로 언제나 에스토니아 사회의 일부분을 이루어 살던 사람들이다.

에스토니아가 접한 사회적 문제를 모두 대변하는 미하일 클바르트 시장은 에스토니아 사회 변방에 놓여있던 소수민족의 후손에서 에스토니아의 정치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11월에는 시장직 재선에도 성공했다. 에스토니아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종들의 샐러드화가 되어가는 중요한 고비에 놓였음을 클바르트는 잘 보여주고 있다.

 

서진석 한국외대 EU연구소 선임연구원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에서 비교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연구원과 기자로 활동했다. 라트비아 대학 한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역임, 발트3국 지역 내의 한국어 발전 방법론과 20세기 이후 발트3국이 겪고 있는 사회적 변화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발트3국』, 『유럽 속의 발트3국』, 『발트3국의 언어와 문화』(공저)가 있다. 『라트비아인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 1,2,3』, 『한국어-라트비아어 학습사전』. 『라트비아인들을 위한 한국문법 1,2』의 출간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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