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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근대의 과학 이미지…기술의 물신화 과정
[디자인 파노라마] 근대의 과학 이미지…기술의 물신화 과정
  • 조현신
  • 승인 2022.03.04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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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⑦_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과 교수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현대 디자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대’라는 시대성이 함의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새로운 기술이었고, 근대 기술의 몸체는 기계였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한 서구 현대 디자인은 기계가 구현하는 기능, 효용성, 미학을 둘러싼 담론의 역사이자 논쟁의 결과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근대의 시작을 ‘기계와의 로맨스’로 규정한 예술사가 로버트 휴즈는 “근대기 새로움의 가장 근원적인 충격이 기계가 가져온 변화”였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에펠탑은 서구 모던 프로젝트의 압축적 상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오 주의 목자 에펠탑이여, 세월이 바뀌면서 나타난 스무 번째 제자여….”라며 신기술이 이룩한 거대한 철골탑을 노래했고, 로베르 들로네는 솟구치는 기운과 역동하는 기운 속에서 거대하게 솟은 붉은 에펠탑을 그렸다. 이뿐인가, 페르낭 레제의 기계인간, 미래파의 화면 속의 속도,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타워 등 예술적 표현으로 구현된 기계문명의 찬미는 서구 근대의 본질이기도 했다. 식민국 조선 역시 이런 과학기술에 대해 다양한 시각적 표현을 보여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한반도는 세계와 동시대 속에서 살고 있었다.

딱지본 속의 과학기술

『철세계』. 출처=근대서지학회, (재)현담문고

신소설 딱지본 『철세계』(1908, 이해조)의 표지는 조선 최후의 어진화가였던 소림 조석진의 그림으로 산수화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상단의 빼곡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한 건물에서 붉은 불이 뿜어져 하단부에 자리 잡은 녹음 속의 도시를 공격하며,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 소설의 원작은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이다. 인도 왕비가 5억 프랑의 유산을 두 과학자에게 주면서 이상 국가를 건설할 것을 부탁했고, 그 둘은 각각 평화와 행복의 도시 프랑스빌과 힘과 권력, 강철무기의 슈탈슈타트(강철도시)를 만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과학자들의 대결이 물리적 기술 대결로 드러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해풍파』. 출처=근대서지학회, (재)현담문고

기계의 힘과 위력을 보여주는 표지를 또 보자. 『서해풍파』(1914, 이상춘)의 표지에는 넘실대는 파도에 대각선의 구도로 거대 함선이 떠 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문센이 남극을 정복한 지 3년 뒤인 191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한국 최초의 해양소설로 평가된다. 과학 정신으로 투철한 조선 청년 2인의 남극 탐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런데 배에 달린 깃발이 일장기다. 처음엔 당연히 태극이었지만 검열 후 바뀐 것이다. 지금 남겨진 이 『서해풍파』의 표지만으로 보아서는 일본인이 주인공이다. 표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일장기가 달린 채 나간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학전’이라는 선명한 낙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값을 많이 준 표지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왼쪽부터 『과학소설 비행선』, 『현미경』, 『천리경』. 출처=근대서지학회, (재)현담문고

김교제가 역술한 『과학소설 비행선』(1912)은 탐정 잡맹특의 문명국에서의 활약을 다룬 소설이다. 같은 양식의 표지를 지닌 『현미경』(김교제, 1912), 『천리경』(박건희, 1912) 역시 탐정소설이다. 이들 표지는 당시 서구에서 한창 유행하던 아르누보적 미감의 조선적 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벚꽃으로 장식된 외관선 중앙에 정교한 비행선과 현미경, 망원경이 배치되어 숭배받고 있는 이 그림이 지닌 함의는 지금 우리의 청소년들이 구글워치나 핸드폰, 인공지능 로봇, 게임에 집착을 보이는 현상의 함의와 다를 바가 없다.

최남선의 근대기획과 이미지 전략

과학 이미지가 이렇게 공상적인 소설의 물증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동시대 최남선 또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민족의 힘을 회복하자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15호의 “『가운기 어비룡』(駕雲氣御飛龍, 구름의 기운을 부리고, 나는 용을 제어한다), 이는 옛날부터 우리의 몽상 중 가장 시적이오 미적의 것”이라며 시작되는 기사 「공중비행」에서는 갖가지 비행선의 사진과 설명이 전개된다. 이 비행기 예찬론은 그가 발간한 『청춘』 제4호에서 급기야 ‘비행기의 창작자는 조선인이라’는 제목으로 매듭지어진다. 신라의 직조, 고려의 자기, 조선의 활자, 선장갑(船裝甲, 거북선) 등 빼어난 발명품과 더불어 『오주연문(五洲衍門)』 저자 이규경의 비행기에 대한 이론에 기반한 제목이다. 계몽적 민족주의적 열정, 비행기가 주는 경이와 그 효용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 낸 기사이다.

 

왼쪽부터 「해상대한사」, 「쾌소년세계주유시보」, 「교남홍조」. 사진=조현신
왼쪽부터 「해상대한사」, 「쾌소년세계주유시보」, 「교남홍조」. 사진=조현신

또한 육지는 비록 점령되었지만, 바다라는 빈 공간을 조선의 운명을 새롭게 해줄 대상으로 삼았던 그는 조선 역사를 해상에 맞춘 「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를 연재했다. 제목 중 ‘해(海)’의 주변을 넘실대는 파도가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상대한사(上大韓史)’의 각 글자는 마름모로 배치되어 천원지방(天元地方)의 지위가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기사에 중간중간 원근법으로 배치된 이미지는 호명된 소년들이 나가야 할 목표의 암묵적 배치였다. 눈앞의 등대를 지표로 삼아 거대한 선박을 부리며, 저 브리튼국의 대교량을 세울 수 있도록 조선의 소년과 청년들은 기상을 키워야 했다. 이외에 국토를 기행하며 쓴 「쾌소년세계주유시보(快少年世界周遊時報)」나 「교남홍조(嶠南鴻爪)」*의 제목 주위에도 힘차게 달리는 기차와 선박 그림이 들어간다. 국토를 횡단하는 기계와 그 힘의 가시적 표현을 통해, 미래를 제공하는 장치다.

(* 교남홍조: 교남은 문경새재 이남 지역이며, 홍조는 손가락을 활짝 편 것처럼 넓은 낙동강 끝 부분 즉 부산과 김해의 삼각주 지역을 일컫는다.)

『소년』 제15호에 실린 태양력 캘린더와 다이어리. 사진=조현신
『소년』 제15호에 실린 태양력 캘린더와 다이어리. 사진=조현신

그는 독자들에게 조선 최초의 다이어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소년』 제15호(1910년 1월)부터는 표지에 융희 4년 1월력이라고 표기된 태양력 캘린더가 들어가고, 말미에는 30일분의 ‘서신(書信)’, ‘사사(私事)’, ‘세사(世事)’, ‘신지식(新知識)’, ‘공과(功過)’ 등의 세목이 적힌 공란의 도표, 즉 워크북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두 이미지는 낮과 밤의 주기가 아닌 인공적 시각에 일상을 맞추고 자신을 스스로 반추하고 검열하는 근대인 만들기의 시각적 지표다.

출처=근대서지학회, (재)현담문고
『문예운동』. 출처=근대서지학회, (재)현담문고

이외에도 천체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이 실리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천체의 운행을 인간사 특히 국가통치와 연관 지어 인식하는 유기적 천체관을 종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후 1920년대 김복진이 디자인한 『문예운동』(1926)의 표지는 기계가 지닌 감각을 타이포그래피로 근사하게 형상화한 디자인 중의 하나다. 이렇게 근대기 조선에 유포된 과학기술에 대한 신봉과 기대를 담은 시각물들은 결국 신을 대치한 과학을 물신화하는 과정의 서막이었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광고와 설득 또한 그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조현신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디자인학과 교수

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디자인물에 관심이 많다. 특히 한국의 근대기 시각디자인문화사를 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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