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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데믹이 바꾼 장례식 문화…“죽음은 곧 생명의 발견”
펜데믹이 바꾼 장례식 문화…“죽음은 곧 생명의 발견”
  • 유무수
  • 승인 2022.02.25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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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88쪽
『더 나은 오늘을 위한 불교강의』 성태용 지음 | 북튜브 | 328쪽
『메멘토 모리』 이어령 지음 김태완 엮음 | 열림원 | 244쪽

비극적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새 언어의 발견
죽음 이후 모르지만 일상이 곧 수행이라는 깨달음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서 유대교 여성 랍비인 델핀 오르빌뢰르는 “팬데믹이 도래하면서… 나 역시 최근 몇 달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리라 상상한 적이 없는 상황들을 목격했다”라고 썼다. 유대교의 기도를 전혀 알지 못했던 한 가족이 부친의 관 앞에서 전화로 도움을 간곡히 요청했다. 랍비인 저자는 평생 처음으로 아파트 거실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유대인 가족을 위해 전화로 장례를 진행했다. 

죽음은 시간의 선형성(線形性)을 중단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별되는 시간 속으로 몰아넣는다. 저자와 깊은 우정을 나눈 친구 아리안이 암으로 쇠약해지고 서서히 언어를 잃어갈 때였다. 아리안이 “내가 원하는 건…”이라고 말의 마무리를 힘겨워할 때 저자가 도왔다. “두려워하지 않는 거라고?” 아리안이 말했다. “초밥 먹고 싶다고.” 그 순간 둘은 크게 웃었다. 저자는 “유치한 웃음조차 종교적인 순간들”이라고 느꼈다. 얼마 후 친구는 유대인들의 표현으로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왼쪽부터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델핀 오르빌뢰르 철학자,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이들은 모두 삶과 죽음, 일상과 수행에 대해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사진=위키백과, 위키피디아, 성태용

아람어 ‘아브라카다브라’는 ‘abra(이루다)’와 ‘Cadabra(말한 대로)'를 의미한다. 언어는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을 만든다. 장례식 날에 삶이 비극의 형식과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고, 다른 어휘와 다른 상황의 언어로 회상될 수 있다면 죽음이 삶을 몽땅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게 의례를 집행하는 랍비의 믿음이다. 

무덤가에서 랍비는 전통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실마리를 건네고 유대 조상 전래의 기도문인 카디시를 암송한다. 카디시는 죽음이나 애도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영광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칭송되고 거룩히 여김 받으소서. 영광되고 높여지고 찬양 받으소서…” 그리하여 유족은 시선의 일부나마 위를 향한 초월을 지향하게 됨으로써 땅의 상실과 아픔에 덜 압도된다.

저자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유대인의 전승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고 분노로 대했던 모세가 자신을 통해 훗날 다른 사람이 더 잘 이야기할 무언가를 갖게 되었음을 바라보면서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고 가르친다. 랍비로서 다양한 사연의 장례식을 집행했던 저자는 더 많은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간혹 질문을 더 가질 뿐이라고 고백한다.

 

술 마시고 여자 희롱한 건 나쁜 기행일 뿐

성태용 전 건국대 교수(철학과)는 재가자 수행단체인 ‘보림선원’에서 보조 지눌(1158~1210)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강의했다. 『더 나은 오늘을 위한 불교강의』는 강의를 녹취하여 편집한 것이다. 지눌은 고려 말 불교가 타락했을 때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새로운 어휘로 부각시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운동을 추진했다. 강의 취지는 출가자의 기본자세와 이념을 조명한 지눌의 가르침을 살펴 재가자의 수행자세를 가다듬자는 것이었다. 

저자가 대학생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으로 밀양 표충사에서 수련회를 할 때 해산 스님이 준 오계 중 하나는 “신발을 벗을 때 반듯하게 벗어놓아라”였다. 일상의 모든 것이 수행으로 귀결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으며, 정혜쌍수와도 연결되는 계율이었다. 

지눌은 ‘망작무애지행(妄作無碍之行, 망령되게 무애지행을 해서는 안 된다)’이라고 가르쳤다. 술 마시고 여자를 희롱하면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듯이 처신했던 어느 스님의 행적이 마치 도인의 기본 행태인 것처럼 여기는 것은 오류다. 행동거지가 어지러울 때 마음도 어지러워진다. 무애행은 심괴불계(深乖佛戒, 부처님의 계율을 크게 어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종교는 집단신경증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던 프로이트에게도 반이성적인 무애행이 있었다. ‘술독에 빠져도 정신만 차려도 된다’가 아니라 술독에 빠지는 행동을 엄숙하게 삼가는 것이 불교의 계율에 부합한다. 이러한 정신을 적용할 때 얼마 전 비대면 강의를 하는 상황에서 목욕을 하며 강의를 하여 논란이 된 교수의 모습은 정신이 산만한 무애행이다.

행동거지와 말투 하나하나에서 수행의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가 다 드러난다. 총학생회장이 되면 교수도 대충 무시하는 무애행의 분위기가 만연했던 시기에 저자가 동료 교수와 길을 걸을 때였다. 당시 총학생회장이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좀 앞질러서 가야될 거 같다고, “선생님 죄송하지만 제가 앞질러서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에는 수행의 향기가 깃들어 있다. 이 학생은 나중에 건국대 교수가 되었다.

지눌이 제안한 보살도는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함께 복(福)의 밭을 이루어가자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나날이 향상하겠다는 향상심을 가지고 정과 혜를 부지런히 닦는 것이었다. 유대교 랍비가 말한 “훗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통해 더 잘 이야기할 무언가”는 수행하는 삶이 없을 때에는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 

 

 

신이 어떻게 현현하는지 아는 게 깨달음

30년 전 이병철 삼성 회장이 정의채 신부에게 ‘종교, 죽음, 신’과 관련하여 스물네 가지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포스트 코로나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우러나오는 궁금증일 것이라고 생각한 언론사 기자(국민일보, 월간조선)가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에게 인터뷰요청을 했다. “오늘 똑같이 죽음에 당면해 병마와 싸우고 계신 이 선생님의 입장에서 답변해주실 수 있는지요.” 『메멘토 모리』에서 이어령 교수는 ‘비유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유추와 상상력으로 글 쓰는 문인이자 기호학자의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의 관점을 표현했다.

이어령 교수도 랍비 델핀 오르빌뢰르처럼 죽고 난 후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답했다. 이어령 교수는 역설적으로 죽음의 발견은 생명의 발견이라고 증언한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지금까지 책에서 읽고 생각하던 죽음이 아니었다. “‘당신 암이야’라고 선고를 받는 순간 갑자기 공기 맛이 달라져요. 방금 전까지 숨 쉬던 그 공기가 아닌 게지. 어제 보던 세상의 빛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아무리 하찮은 것들이라 해도 저것들을 이제 더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아주 다르게 보인다는 겁니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증명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에 지능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대신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다. “신은 우리에게 어떻게 현현하는가?” 바울이 말에서 떨어지고, 루터가 광야에서 벼락을 만나고, 베드로가 고기를 잡던 어느 날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기독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3-10)에서 “복 있는 자”라고 언급한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등’이 천국 간다고 해석했다.

성경은 예수가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막히는 과정의 디테일을 기록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죽음의 문제를 리얼한 고통으로 나타낸다는 게 저자의 스토리텔링이다. 예수의 사도들도 비참하게 죽었다.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뒤를 따라가면 육신을 넘어서는 저편 너머 초월의 세계를 볼 수 있다”라고 믿고 있기에 이어령 교수는 육체적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몸에 진통이 올 때는 주기도문을 외운다.

 

의례로 불안·고뇌가 야기하는 인격 붕괴 막아

진실추구의 의지와 믿음의 결단이 투영된 종교와의 관계에서 길어내는 ‘의미’는 감정의 일정한 형식과 그 배출 통로를 규정해준다. 리차드 컴스탁은 『종교의 이해』(윤원철 옮김, 지식과교양, 2017)에서 인간은 우연성, 무력함, 결핍의 상황에서 “의례를 통해 희망과 신념을 확인하여 더욱 크게 노력하도록 고무”되기도 하며 “성스러운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고, 불변의 진리에 대한 신념을 붙듬으로써 불안과 고뇌에서 야기되는 인격의 붕괴를 막기도 한다”라고 종교의 심층심리적 기능을 설명했다. 

프로이트가 종교를 통해서 그런 ‘의미’를 공급받는 선택을 했다면 ‘죽음을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만으로도 기절(『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조성기 옮김, 김영사, 2007)’하곤 했을까.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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