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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경제이다
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경제이다
  • 안재원
  • 승인 2022.02.2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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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 선도 국가란 무엇인가 ⑥

"‘선도국가론’의 저작권자는 바로 안중근이다. 
평화 경제론에 입각한 동양 평화론을 주장하였고, 
경제를 평화의 실천 방안이자 인류의 공존과 공영을 위한 
실행 지침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평화 경제를 선도하는 선도국가 대한민국의 길라잡이로 
안중근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전운이 짙게 감돌고 있다. 무슨 이유로든, 어떤 명분으로든, 전쟁은 안 된다. 사정은 동아시아에서도 비슷하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과 대립이 아직은 연성 단계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강성 단계로 발전할 소지가 높다.

만약,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동쪽에서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어 세계가 이른바 탈냉전에서 신냉전 시대로 전환된다면, 이로 말미암아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을 분야는 어디일까. 경제이다. 글로벌 가치 연결 체제로 서로 긴밀하게 엮이고 묶인 산업 체인과 비즈니스 체인이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전쟁과 평화, 아직도 19세기 사유에 머물러

하지만, 만에 하나 유라시아의 어느 곳에서, 서쪽이든 동쪽이든,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는 이전 전쟁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승리해도 지고, 패배해도 지는 것이 될 것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전쟁은 인류의 공멸이므로. 그도 그럴 것이, 21세기의 전쟁은 19세기 제국주의를 주도했던 패권 국가들이 주도했던 세계 전쟁과도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전환이 절실하다. 

예전에는 전쟁도 경제의 한 양태였다. 로마 제국이 그랬고, 근세의 서구 패권 국가들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가 그랬다. 전형적인 약탈 경제 혹은 수탈 경제를 연장하기 위한 수단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약탈과 수탈의 수단으로써의 효용성을 이미 상실했다. 세계화 시대에 전쟁은 더욱 그렇다. 예컨대,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종말고고도지역방어체계)’배치가 그 사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던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했던가. 

각설하고, 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경제이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생존의 도구이고 경쟁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이렇게 변했음에도,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19세기 사유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쉽다. 아니 무섭다. 인류의 공멸로 이어지는 전쟁에 대한 19세기의 인식과 논리를 추종하고 부추기는 세력이 역사의 무대에서 다시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거나 주인공이 되려고 시도하는 세력이 끊임없이 준동하고 있기에. 

하지만, 19세기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역사는 잘 보여준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관을 대표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말이다. 

본래 치(治)란 난(亂)을 잊지 않고, 평상시에 국가에 군사력(軍備)을 완전하게 갖추어 놓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기초가 된다는 점은 세계인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다. (…) 평화는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오로지 국가 발전을 위해서 국력 증진을 하고자 할 때, 평화 없이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1909년 8월 9일에 야마가타(山形)시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

이토의 말은, 얼핏 보면, 평화에 대한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린다. 원래, 평화를 뜻하는 영어 peace의 어원에 해당하는 라틴어 pax는 공존과 공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강자가 약자를 제압하고 지배하는 ‘패권(覇權)’을 가리킨다. 순종하는 자에게 관용과 오만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는 것이 로마 제국의 핵심이었다. 여기에는 자기들 이외에 다른 나라는 없다. 다른 나라는 모두 야만이고 복속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토의 말도 잘 들여다보면,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의 생각에 다른 나라는 없다. 요컨대 “치(治)란 난(亂)을 잊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패권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 곧 타자의 절멸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키투스(Tacitus, 서기 55~120)는 “모든 것이 사막이 되어버린 곳을 제국이라고 부른다”(『아그리콜라』, 31)고 말한다. 

‘동양평화론’은 서문(序文),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으로 나눠져 있다. 안중근 의사는 서문과 전감 일부만을 집필했고, 나머지는 일제가 서둘러 사형을 집행해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 안 의사가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과의 면담기록인 ‘청취서’(聽取書) 내용 중에 안 의사가 쓰고자했던 ‘동양평화론’ 부분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

안중근 “평화의 실체는 경제적 공존·공영”

진정한 평화는 공존에서 성립한다. 타자를 존중하는 것이 공존이다. 국가 차원에서 타자를 인정하자는 것이 『만국공법』의 기본 이념이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을 들어서 국가의 공존을 강조한다. 이토의 평화론에는 이런 공존의 이념이 없다. 제국의 패권주의에 봉사하는 군국주의에 불과하다. 이토의 ‘평화’ 개념은 패권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19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평화관이었다.

그가 말하는 ‘평화’는 전쟁에 대등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약탈 경제를 합리화하는 수단 개념이었다. 전쟁의 하위 방법론이었다. 사실, ‘평화’의 명목으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본 제국의 군대를 주둔시켜려는 핑계에 불과했다. 동양을 온통 전쟁터로 몰아넣어 총성이 하루도 멈추지 않도록 만든 것이 이토가 추진한 평화 정책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일본으로 말미암아 동양에서 벌어진 전쟁이 그 방증이다. 1894년 청일전쟁, 1904~1905년 벌어진 러일 전쟁, 1927년~1931년에 벌어진 만주사변, 1937~1945년 벌어진 중일전쟁, 1941년~1945년 태평양전쟁을 본다면, 이등박문 자신의 주장과 정책이 얼마나 허황되고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1950~1953년 벌어진 6.25 전쟁도 일본의 침략 정책에서 연원한다. 

안중근 의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안중근은 “내 생각에 쉬운 일이다. 전쟁도,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단 하나,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청취서’)고 하면서 전쟁을 단호하게 배척한다. 안중근이 19세기 제국주의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인식과 논리를 혁파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지 무력 충돌이 없는 상태를 평화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공존과 공영을 도모하는 것을 평화의 실체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평화 경제론에 입각한 것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다. 그의 말이다. 

일본·한국·청은 형제국가이다. 서로 지극히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 세 나라의 능력 있는 자들을 그 땅에 모아 평화회(平和會) 같은 모임을 조직하여 세계에 공표하는 것이다. (…) 일본·청국·한국은 평화와 행복을 영구히 얻을 것이다. (…) 은행을 설립해 각 나라가 공유하는 화폐를 발행하면 반드시 신용을 얻게 된다. 금융은 자연스럽게 돌아갈 것이다. (…) 이상의 방법으로 동양평화는 완전해진다. (…) 청국·한국 두 나라 모두 그 행복을 누리고, 또 여러 나라에 모범을 보일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인도·태국·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는 자처해서 ‘평화회’에 가맹을 신청할 것이다.(‘청취서’) 

유럽연합 ‘선언’보다 40년 앞선 ‘동양평화론’

안중근의 평화경제론을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인 이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 연합(EU)을 보라. 유럽 연합은 정경분리의 원리에 입각해서 경제적으로 공존과 공영의 길을 가고 있다. 유럽 연합을 주도했던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트 슈망(Robert Schuman)의 말이다. 

세계를 위협하는 위험에 맞서는 창조적인 노력 없이 세계 평화는 결코 지켜질 수 없다. 하나로 조직되어 생동하는 유럽이 문명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평화로운 관계의 유지와 직결되어있다. (…) 하나된 유럽은 성취되지 않았다. 우리는 전쟁을 치루었다. 유럽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1950년 5월 9일에 행한 ‘슈망 선언’의 일부)

사실, 안중근이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슈망의 유럽연합 ‘선언’보다 40년이 앞선다. 안타깝게도, 안중근의 주장은 아직도 제안에 머무르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실천하려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이 이제는 그 필요성과 실효성을 상실했고, 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경제임을 선도적으로 주장했던 선도자가 안중근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책을 말하겠다. (…) 어제 오늘 생각한 것이 아니고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 즉 이전에 여러 나라에서 사용한 방법을 흉내 내었는데, 바로 약소국을 쓰러뜨리고 그 나라를 병탄하려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결코 패권을 장악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세계열강이 하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한다. (‘청취서’ 일부)

이렇게 “세계의 열강이 하지 않았던 일”을 선도적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른바 ‘선도국가론’의 저작권자는 바로 안중근이다. 그것도 단순 선언이 아니라, 평화 경제론에 입각한 동양 평화론을 주장하였고, 경제를 평화의 실천 방안이자 인류의 공존과 공영을 위한 실행 지침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평화가 밥이고 평화가 경제인 상황에서, 그도 그럴 것이, 평화 경제를 선도하는 것이 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딱히 다른 길도 없는 상황에서, 평화 경제를 선도하는 선도국가 대한민국의 길라잡이로 안중근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서양고전문헌학
서울대에서 언어학 학사와 서양고전학 석사를 했다. 독일 괴팅엔대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역서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인문의 재발견』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  『수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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