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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기시다 총리의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 한국이 주목해야 할 이유
[글로컬 오디세이] 기시다 총리의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 한국이 주목해야 할 이유
  • 남기정
  • 승인 2022.02.24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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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1월 28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하고 있다. 사도 광산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다. 사진=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1월 28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하고 있다. 사도 광산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다. 사진=연합뉴스

연초부터 한일관계는 사도광산 문제로 시끄럽다. 한일관계 악화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사안의 맥락과 주변 정황을 확인하느라 잠시도 편할 날 없는 것은 한일관계 연구자의 숙명이리라.

지난 연말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진과 관련해서 기시다 총리는 속도 조절에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2월 1일 신청 마감을 앞두고 결국 강행 방침으로 돌아섰다. 그 배경에 한국과의 ‘역사전’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아베 전 총리의 입김이 있었다. 역사수정주의를 넘어서 역사부정론이 일본 정계의 중심에 똬리를 틀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대일 접근은 일회성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서 더욱 큰 경계심과 근본적인 대응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움직임이 아베와 기시다 사이의 미묘한 당내 역학관계에서 나왔다는 점은 이번 사태를 일본 정치사의 긴 맥락에서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기시다 총리가 새해에 강조하기 시작한 외교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이번 사태를 둘러싼 환경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 바, 이를 이해하는데 전후 일본 정치사를 파악해 두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는 연두 소감에서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라는 새로운 개념을 동원해 자신의 외교 구상을 설명했다. 지난달 17일 시정방침연설에서도 이 개념으로 자신의 외교 구상을 설명했지만, 내용상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단지 용어가 새로웠을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 기시다의 의도가 담겨있다.

기시다 총리가 이 개념을 처음 사용했던 것은 지난해 12월 22일 ‘요미우리 국제경제 간담회(YIES)’의 강연회에서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자민당 정책 집단 ‘고치카이(宏池会)’가 추구했던 외교를 ‘리얼리즘 외교’로 규정하고, 이를 체화하면서 성장한 정치인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강연에서 ‘고치카이’ 리얼리즘을 구현한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들었던 인물이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들이다. 모두 외무상으로의 경력에 높은 평점이 주어지는 사람들이다. 특히 중일관계에서 성과를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오히라는 외무상 시절이던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를 실현한 인물이며, 미야자와는 1992년 헤이세이 천황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총리였던 인물이다. 모두 당내 보수 강경파, 친 대만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룬 외교 성과들이다. 그렇게 올해 중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았다.

결국,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에 중일 관계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중일관계에 대해 ‘할 말을 하는 태도’와 함께 협력 상대로서 중국과 ‘지속적인 대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의연한 외교’를 소리 높여 강조하던 지난 두 번의 내각과는 다른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중일관계를 관리하려는 기시다 총리의 입장은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 보이콧’이 부상하는 속에서도 견지되었다. 경제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중한 판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아베 등 대중 강경파에 밀리듯이 결국 연말에 기시다 총리는 정부대표단을 파견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야마시타 야스히로(山下泰裕) 일본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하시모토 세이코(橋本聖子)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장 등이 참석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 측은 이를 ‘환영’했다. 일본 측이 ‘장고’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외교 보이콧’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고려된 반응이었다. 중국 측의 억제된 반응에서, 중국 측은 ‘외교 보이콧’ 국면에서 오히려 기시다 내각의 ‘성의’를 확인하고 있었다.

지난 연말 사도광산 문제를 둘러싸고 기시다 내각이 속도 조절에 들어가는 듯이 보였던 것은 한일관계도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 구상의 흐름 속에서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한 달 후에 등재 강행으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은 아베의 ‘주장하는 외교’에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기시다 내각의 한계를 보여준다.

기시다 총리가 자신의 외교 구상을 ‘리얼리즘’ 외교로 규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민당 내 ‘리버럴’을 대표하는 그룹으로 ‘고치카이’를 이해하는데 균열을 자아내는 표현이다. 하지만, 아베 그룹에 전유당한 ‘리얼리즘’을 재전유함으로써 아베 그룹을 ‘이념주의자’로 밀어내고, ‘이념 외교’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시다 내각의 ‘신시대 리얼리즘 외교’가 목표하는 것은 중일관계의 원만한 관리이며, 올해 여름의 참의원 선거 성적 여하에 따라 그 실행력은 달라질 것이다.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기시다 내각의 일본은 매우 복잡한 행보를 보일 것이다. 그것은 미일동맹 대중국이라는 단순 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반중 정서에 편승해 한미일 협력 복원에 목을 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복원되어야 하는 것은 ‘외교의 리얼리즘’이며, 이를 위한 기회가 2012년 아베 2차 내각 등장 이후 10년을 지나 새로 열리고 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일본 정치와 외교이며 현재 민교협 상임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주요 논문과 저작으로 「정치 기획으로서 <반일종족주의>: 유령잡기에 도전함」(2020), 『기지국가의 탄생』(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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