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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미적 현상”…지식이 아니라 암시와 매혹
“사물은 미적 현상”…지식이 아니라 암시와 매혹
  • 문규민
  • 승인 2022.02.18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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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사물들의 우주』 스티븐 샤비로 지음 | 안호성 옮김 | 갈무리 | 304쪽

화이트헤드가 드러낸 각종 전회와 사상들의 핵심
사변적 미학으로 모든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인간

한때 ‘종언’의 담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피로 때문인지 실망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몇몇 지식인들은 수백 종의 생명이 멸종하는 사태보다 인간종이 지극히 최근에 만들어 낸 몇몇 현상의 종언을 더 심각하게 고민했다. 철학의 종언, 역사의 종언, 이데올로기의 종언, 근대문학의 종언. 멸종보다 종언. 그들은 마치 예언자라도 된 양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쿨하게 종언을 고했지만, 그 중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지금은 ‘전회’가 종언을 대체하고 있는 것 같다. 존재론적 전회, 물질적 전회, 실재론적 전회, 비인간적 전회. 종언이 아니라 전회. 호기롭게 끝을 선언하다 헛물을 켠 경험을 잊지 않는다면, 단호하고도 신중하게 사유와 실천의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이다. 전회의 시대를 종언의 시대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존재론, 퀑텡 메이야수와 레이 브라시에로 대표되는 사변적 실재론을 끊임 없이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그들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교나 대조는 쉽게 허수아비 때리기나 들러리 세우기로 변질되지만, 『사물들의 우주』는 그런 위험을 성공적으로 회피하면서 화이트헤드와 객체지향존재론, 사변적 실재론 모두를 꼼꼼하게 읽어내고 있다.      

쉽게 넘기기 어려운 내용이 매 장마다 펼쳐진다. 1장 ‘자기향유와 관심’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해설하고 이를 타자와 윤리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의와 대질시킨다. 2장 ‘활화산’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과 하먼의 객체지향존재론의 전면적인 비교와 대조가 이루어지는 ‘화이트헤드 대 하먼’이라고 할 만하다. 3장 ‘사물들의 우주’에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하이데거의 도구-존재, 제인 베넷의 생기론적 유물론과 공명한다. 

 

책상도 나름 정신을 갖고 있을까

심리철학을 전공한 서평자로서는 4장 ’범심론 그리고/혹은 제거주의‘와 5장 ‘범심론의 귀결’이 매우 인상깊었다. 범심론은 거칠게 말해 도저히 정신을 가질 수 없어 보이는 무기적 존재자들, 예컨대 책상이나 쿼크조차도 미약하게나마 나름의 정신을 갖고 있다는 가설이다. 그냥 듣기에도 너무나 반직관적이라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일축하기 쉽지만, 현재 범심론은 심리철학에서 가장 핫한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런데 샤비로는 화이트헤드가 경험, 파악, 느낌 등 인간의 정신을 기술하는 개념들을 급진적으로 탈인간화하여 존재론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런 특징이 탈인간중심주의는 물론 일종의 범심론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며, 가치를 평가하듯이, 모든 존재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느끼고, 경험하며,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샤비로는 이를 보이기 위해 주체의 현상적 경험과 관련된 심리철학의 논의를 참조하고, 이 과정에서 메이야수와 브라시에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분석을 제공한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영국의 철학자·수학자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수리 논리학(기호논리학)의 대성자 중 한 사람이다. 사진=위키백과

6장 ‘비상관주의적 사고’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메이야수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상관주의를 벗어나려는 메이야수와 브라시에의 시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가 논의되며, 그들이 내세우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한 대안으로 일종의 “자폐적” 사고, 즉 ““비인지적”이며 비-비판적인” “일종의 현상학 없는 현상성”으로서의 비상관주의적 사고가 제시된다. 이런 사고는 본질적으로 미학적이며,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느낌과 유사하다. 

마지막 7장 ‘아이스테시스’에서 샤비로는 탈인간화되고 일반화된 미학을 제1철학으로 놓는 하먼의 논증, 그리고 칸트의 미학을 참조하면서 다시 한 번 화이트헤드와 하먼이 만나는 지점들, 그리고 둘이 갈라서는 지점들을 드러낸다. 여기서 샤비로가 제시하는 대안은 사변적 미학이다. 화이트헤드와 하먼에게 실재는 의식을 통해 인식되기 보다는 느낌을 통해 암시될 따름이다. 인간은 알려지는 사물에 대해 지식을 가지는 게 아니라 암시되는 사물에 대해 매혹을 느끼는 것이다. 메이야수에게 모든 것은 난데없는 우발성의 산물이고, 하먼에게 모든 것은 진공 속에 유폐된 객체이지만, 샤비로에게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느끼고 느껴지는 미적 현상인 것이다.  

 

전회의 시대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백두송가

최근의 사상 조류에 대한 일정 수준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논의가 객체지향존재론과 사변적 실재론에 바쳐져 있으며 신유물론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물들의 우주』의 단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의 크나큰 미덕은 화이트헤드와 사변적 실재론 모두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어딘가에서 “W로 시작하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아닌 화이트헤드일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 샤비로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최근 신유물론과 사변적 실재론 등이 다소 급하게 유입되면서 종종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 인상비평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물들의 우주』는 이를 차분하게 교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샤비로의 서술은 평이한 듯 하면서도 명료하며, 무엇보다 정확하다. 만약에 이 책이 읽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책이 담아내는 내용이 심오해서이지 문장이 어려운 탓은 아닐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는 귀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는 수준 높은 형이상학책이자, 전회의 시대에 부르는 백두송가(白頭頌歌)다. 따라서 종언은 없는 것이다. “관념의 모험”은   계속된다.  

 

 

문규민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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