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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觀은 김수근답게…내부는 경악스러움
外觀은 김수근답게…내부는 경악스러움
  • 안창모 경기대
  • 승인 2005.10.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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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진단: 남영동 보안분실 건축, 역사 그리고 윤리

[편집자주] 지난 7월 26일 남영동 보안분실은 인권보호센터로 넘어갔다. 이제는 경찰의 수사업무를 위한 것이 아닌 ‘인권의 상징’으로서 보안분실이 거듭나게 된 것. 그러나 그간 보안분실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만 부각됐을 뿐, 이를 맡은 건축가가 용도에 따라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했는가에 대해선 다뤄지지 않았다. 이에 건축전문가가 본 ‘남영동 보안분실 설계’에 초점을 두어 그 의미를 부각시켜 보았다. 

▲반공포스터 ©
고문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사회 도처에 널려 있다. 어두웠던 시절, 권력을 유지하는 일등 공신의 하나가 고문이었고, 고문은 오랜 동안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구속하는데 결정적 도구로 사용되었었다. 공포의 상징인 ‘고문’이 얼마나 끔직한 지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더욱 두려워했고 결과적으로 위정자의 뜻대로 사회를 움직이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건축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금언이 유효하다고 믿는 필자는 암울했던 사회의 한 축을 담당했던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어떻게 권력을 담아낼 수 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비오는 날 방문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최근 용도가 인권센터로 바뀐 후 민원을 처리하는 여느 관공서처럼 항상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듯 했다. 열린 대문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마당과 잔디는 영문을 모른 채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러브호텔이 즐비한 남영동 이면도로의 모습으로는 영 어색하다. 좀처럼 녹지를 찾기 어려운 남영동 일대에서 성북동 주택에나 있음직한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으니….


건물에는 김수근의 건축언어가 곳곳에 살아있었다. 검은 벽돌의 사용과 돌출된 창과 세로로 긴 창, 그리고 모서리를 접어서 출입구를 만드는 수법이 전형적인 70년대 김수근의 건축어휘였다. 건물이 다소 껑충해 보였는데, 이는 5층에 2층을 더해 7층으로 증축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널찍한 대지에 5층과 2층의 매스로 풀어낸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건물 자체로는 시선을 끌만큼 크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어딘가 남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 것은 건물의 용도와 이에 대응하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작업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전통재료인 검은 벽돌…공포스러울 수도

우선 검은 벽돌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우리에게는 벽돌을 사용하는 건축전통이 없었지만 정조시대에 축성된 수원성에서 정약용이 검은 벽돌을 사용한 이후 검은 벽돌은 근대 재료이면서도 우리 정서에 맞는 건축 재료로 인식되고 있었다. 검은 벽돌은 김수근이 1971년 공간사옥에서 사용한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주택은 물론 상업시설(대우아케이드)과 공공시설(수표교공원, 서울교대캠퍼스 등)에서도 활발하게 사용한 재료였다. 김수근은 주택(우촌장)을 설계하면서 “인근 한옥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재료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한국 고유의 전통적인 재료인 회색 전돌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건물에서도 같은 생각으로 검은 벽돌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우촌장과는 달리 주변에 전통주택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70년대 초 주택에서 시도한 검은 벽돌에 자신감을 확보한 건축가가 그 용도를 공공건물에 확대 적용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런데, 검은 벽돌의 사용에 대해서 일반의 평가는 전문가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대공분실이 보여준다. 혹자는 대공분실의 검은 벽돌을 보고 공포스럽다고 한다. 객관적이지 않은 반응이지만 대중적 감수성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故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이 건물을 알게 된 이들은 검은 벽돌의 이미지와 고문의 끔찍함 그리고 암울했던 시기를 자연스럽게 연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건축가에게 있어 검은 벽돌의 사용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고민한 결과였다. 특히 60년대 후반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왜색시비논쟁에 휘말렸던 경험이 있는 김수근은 여느 건축가보다도 현대건축에서 우리의 정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는데, 이 때 선택한 결과가 검은 벽돌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수사기관 건물에 전통 내음이 물씬 풍기는 재료를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설계에 임했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당대 최고 건축가가 인권유린의 상징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설계했다니…. 어처구니없는 일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일수도 있는 일이었다.

과연 건축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 건물을 설계했을까. 이 의문을 안내해주던 분에게 던졌더니 의외로 쉽게 답을 제시했다. ‘애국하는 마음으로 설계했겠죠!’ 이 건물은 간첩을 잡는 용도의 건물이었고, 당시에 간첩을 잡는 데 일조하는 것은 애국의 첫 번째 덕목이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 못지않게 강조되었던 것이 ‘반공’이었고 거리 곳곳에는 간첩신고를 독려하는 포스터나 글귀가 지천으로 널려있을 때였기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70년대 ‘愛國’했던 건축가?

이쯤 되면 이 건물을 유명 건축가에게 의뢰한 관료를 기특하게 생각해야할까. 한번 쯤 생각해 볼 일이다. 현관의 정초석에는 발주처가 내무부였고 당시 장관이 김치열 씨였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김수근이 어떻게 설계를 의뢰받았는지 짐작케 한다. 이 건물은 건축가에게 의뢰된 것이 아니라 김수근에게 의뢰된 건물이었던 것이다. 5·16쿠데타 주도세력과 막역했던 김수근이 이들의 후원 하에 대규모 공공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이 있기에 김치열 장관 시절에 이 건물의 설계를 의뢰받는 것이 당시로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의 건물은 이 건물이 건축되는 배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히려 이전에 설계한 자유센터나 이후의 경찰청 건물, 서울지방법원들처럼 권위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이제야 제 모습에 맞는 역할을 맡게 된 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건물을 둘러보면서 수사용도 건물이 갖는 특징들 외에 지하실이 없다는 점이 눈에 두드러졌다. 북한의 전쟁도발을 무기로 국민을 압박하던 시절에 전쟁에 대비해 모든 건물에 지하실 설치를 의무화했었는데, 정작 간첩잡는 건물에 지하실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지하실이 없기에 지하실에 있으면 어울릴 듯한 취조용 사무실이 5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지하실을 파서 취조실을 설치하지 않고 전망 좋은 5층에 취조실을 두었을까. 1970년대 중반에 남영동 일대에서 5층이면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높이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남영동 일대가 간첩들에게 자랑할 만큼 서울의 발전상을 보여줄 만한 곳도 아니었기에 지하실을 만들지 않고 취조실을 지상5층에 두었다는 사실은 건축가가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5층이다. 5층에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현장이 보존돼 있어 이곳을 찾는 이로 하여금 감회에 젖게 만든다. 취조실이 배치되어 있는 5층 복도는 마치 기숙사를 연상시키지만, 그 곳이 기숙사가 아님은 개개의 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에서 잘 드러난다.

취조실 문에는 렌즈가 있었는데, 렌즈는 아파트 문의 그것과는 달리 취조실 안의 모습을 관찰하는 한 방편으로 설치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침대와 작은 책상이 의자와 함께 있고 안쪽으로는 세면대와 욕조가 있다. 죄목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렸을 현장이다. 선입견을 갖지 않고 본다면 1인용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는 실용적 실구성이지만, 이곳이 고문치사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보는 이를 경악케 하기에 충분하다. 방에는 작은 창문이 2개씩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그 창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피의자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좁고 길게 되어 있다. 절대로 사람 몸이 창밖으로 나갈 수 없는 크기다. 해서, 이곳은 유치장 이상으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철창이 하나도 없다. 공교롭게도 세로로 긴 창은 당시 김수근이 즐겨 사용하던 창과 비슷해서 별도의 설명을 듣기 전에는 건물의 외관에서 5층 건물의 용도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 더해서 취조실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확실하게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는 폐쇄회로 TV도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을 둘러보고 나니 끔찍했던 시절의 건물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한 외관의 천연덕스러움에 많은 사람이 분개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재 대공분실은 인권보호센터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대공분실을 더욱 잘 활용하기 위한 논의가 시민단체와 경찰청이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역사적 의의가 큰 건물인 만큼 활용에는 건물이 보존되는 목적에 맞는 활용이 모색되겠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의 경우, 특정 용도로의 활용 못지않게 ‘국민의 인권’과 관련된 시설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널리 홍보해 ‘인권’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눈과 귀를 열어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인권 관련 시설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린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인권을 유린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창모 / 경기대·건축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건축가 박동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반공이데올로기와 도시, 그리고 건축’ 등의 논문과, ‘한국근대문화유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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