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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 절대왕정 꿈꿔” … 國家慶日 ‘음력’으로 제정한 것 주목
“高宗, 절대왕정 꿈꿔” … 國家慶日 ‘음력’으로 제정한 것 주목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0.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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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 한림대 한국학연구소 심포지엄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10월 28일) 열려

대한제국의 성격 및 근대화 성과를 두고 한림대 한국학연구소가 논의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지난해 교수신문을 통해 진행되었던 ‘대한제국 논쟁’을 좀더 끌고나가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소장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는 대한제국을 쟁점으로 삼는 이유를 “자주독립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제에 국권침탈을 당했다는 최종 책임을 지는 만큼, 그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한국 근대화의 출발에 대한 해명이며, 그 평가는 곧바로 일제 강점기의 성격 규정과 연결되고, 현재 한국 사회의 가치관과 진로 모색에도 직결된다”라고 설명했다. 1편의 기조강연과 6편의 논문이 발표된 이번 학술대회의 논지를 발표자 별로 정리, 소개한다.

제1발표 : 국가론적 측면에서 본 대한제국의 성격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그간의 논쟁이 대한제국의 역사적 단계와 국가 권력의 성격 분석을 위한 이론적 합의가 미비했기에 ‘국가론’을 향한 총체적 사회구성체를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즉 경제적 토대로서의 봉건제와 장기간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발전시켰던 조선왕조의 유산을 대한제국이 어떻게 질적으로 변화시켰는가, 아닌가하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먼저 황제권의 문제. 서 교수는 고종은 1880년대 이래 東道西器 단계에 있었고 대한제국기에는 그 단계도 넘어 근대적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패도적 성격의) 군주상을 지향하였다고 하였다. 고종이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명치천황을 옹립하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달성한 일본을 고무적인 전례로 생각한 것은 사실이나 다만 ‘방법’의 측면이었음도 유념해야 한다.


다음은 대한제국기 권력구조와 집권세력의 문제. 대한제국기에는 전통적인 儒者 관료가 퇴진하고, 서자나 무과 출신의 실무·신흥·근왕 관료가 출현하여 지배층의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고 결국 유교 이념에 기반한 전통국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런 권력형태는 절대권력을 확립한 군주가 근왕관료를 통해 귀족을 배제하고 직접 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유럽의 절대왕정을 연상시킨다.


다음은 물적 토대 문제. 통치 기구로서 궁내부와 원수부가 강화되어 황제가 내치, 군사의 중심이 되었고 전통적 君·臣 관계는 해체되었다. 궁내부를 통한 막대한 황실 재산을 형성하여 권력의 물질적 기초를 유지했는데 조선후기 궁방의 수세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이는 근대 조세 국가로 가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제2발표 : 대한제국의 경제개혁사업과 재정 상황


이윤상 창원대 교수가 바라본 대한제국의 경제 개혁 사업과 재정 상황은 그리 밝지 않다. 갑오개혁기에 무명잡세 혁파 방침에 따라 폐지되었던 세금이 궁내부, 내장원을 중심으로 복구되었고 또 새로운 세원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실제 운용은 상공업 진흥이나 생산자 보호보다는 독점권 부여와 수세 확대라는 성격이 강하였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서울의 도시 정비, 量田地契 사업, 화폐 제도 개혁, 중앙은행 설립 시도, 전차·전기 사업 등이 추진되었다.


짧은 시간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노력을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그 궁극적 목표가 부국강병과 황제권의 과시라는 정치적 요소였으므로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다. 일본의 방해가 크다는 것은 주지하는 일이지만, 고종의 세력균형정책이 열강 사이의 상호 견제를 유발하여 거꾸로 개혁사업을 제약하게 만든 요인도 주목해야 한다.


고종과 주도 세력이 일원화하지 못했던 점, 차관 도입의 실패 또한 경제개혁 사업을 실패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다음은 재정이다. 정부 재정에서는 미납액이 많았음에 비해 황실 재정과 군사비는 큰 폭으로 증가하여 오히려 정부 재정을 더욱 압박하였다.


수탈을 통한 근대 국가의 수립은 세계사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나 재정 조성과 운용의 비합리성과 무체계성이 문제였다. 황제가 재정 운용을 주도했다는 것이나 많은 재원을 황실 재정으로 가져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고종이 생각했던 근대국가와 그것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황제의 지위를 지키고 왕조를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기에 경제 제도는 그에 종속되었고 결국 근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경제적 기초 확립은 실패하였다.

제3발표 : 고종의 대내외 정세 인식과 대한제국의 외교


강상규 서울대 연구원은 대한제국에 대해, 서구·근대의 시각을 벗어나, 근대국제질서에 맞닥뜨린 ‘문명사적 전환기’에 처한 조선의 응전이라는 시각에서 볼 것을 제시하고, 정치와 외교 행위의 핵심인 고종의 의식 형성과 선택의 필연성을 탐구했다.


19세기 후반을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자 발전’이라고 파악하기 이전에, ‘이질적인 문명 사이의 긴장된 만남’으로 보아 당대의 정치적 사유 방식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전반부는 청년기 고종이 유교적 위민 의식을 형성하는 과정, 중화 의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서술하였다.


이후 고종은 親政 과정에서 통리기무아문을 통해 개화 자강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고 나아가 만국공법 체제의 수용과 동도서기에 입각한 부강책을 강조하는 선까지 나아갔으나 갑신정변으로 일시 좌절되었다.


대한제국 성립기에는 보수유생층까지도 오히려 만국공법을 수용하는 등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고종은 만국공법의 국가와 군주에 대한 규정을 적극 해석해 군주권을 주권 수호의 최소한의 요건으로 받아들이고 황제권 강화에 진력했다. 또한 개혁을 중시하는 것이 조선의 전통과 결합하지 못할 경우 국가적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내적 구심력을 확보하려 하였다.


당시 고종이 내세운 舊本新參은 이전 東道西器 구호가 지닌 공간적 성격에 시간적 가치가 결합된 것으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문명 사이의 충돌과 응전으로 파악할 경우 기존 평가를 넘는 시각이 도출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나 성공이냐’가 아니라 ‘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는가’였으며, 개혁의 성과가 아닌 개혁의 ‘주체’와 ‘방법’을 둘러싼 문제이다.

제4발표 : 대한제국 시기 역법정책과 종교문화


임현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대한제국이 음양력을 병용하였던 것이 근대성이라는 일원적 기준으로만 평가되는 것을 거부하고 이미 피해갈 수 없었던 근대성을 수용하는 조선식의 경로에 초점을 맞춘다. 태양력 도입은 원래 갑오개혁의 성과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던 갑오개혁의 다른 법령과 마찬가지로, 태양력은 대한제국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소멸의 기로에 있던 시헌력(음력)이 복권된 점이었다. 대한제국기는 양력과 음력(전통적 시헌력)이 병존하였다. 양력은 행정 공문서, 경제·외교와 담당한 영역에서 쓰여 사실상 공적 활동을 규제하였다.


음력은 국가 전례를 비롯한 각종 의례의 지표로서 활용되었다. 양력과 음력의 공존 혹은 분리는 기존의 政敎 未分이 해체되고 종교와 정치, 종교와 종교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이른바 근대적 정교 분리의 범주가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뿌리내린 것은 음력의 의례력으로서의 기능이 중요할 것이다.


한편 대한제국기에 國家慶日이 유지되거나 새로 제정된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국가경일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이었고 神格에 대한 의례가 아니었다. 이는 태양력 도입과 함께 생긴 것으로 우주, 신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던 전근대 관념의 수정이었다. 대한제국에서 국가경일을 음력에 맞추어 유지, 제정한 것은 수용 주체의 의지가 잘 드러난 일이었다. 요컨대 음양력 병용 정책인 대한제국의 역법정책은 태양력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동시에 전통력인 음력의 위상과 기능을 일정한 변형을 거쳐 지속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현재의 음양력 병용은 대한제국 시기 역법 정책의 유산이다.

제5발표 : 도면자료로 본 대한제국기 한성부 도시건축 변화


전봉희 서울대 교수는 규장각에 소장된 1900년대 초반의 도면 자료를 소개한다. 이 자료들은 그간 부분적으로 언급된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전모가 밝혀지기는 처음이므로 퍽 의의가 깊다. 전 교수는 처음 소개되는 평면도를 통해 대한제국기 도시 건축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구 의정부·이조·糧餉廳 등의 관아 시설, 영희전·수진궁·창의궁 등의 宮, 무관학교 등의 군사 시설 등의 면모가 소개된다.


또한 덕수궁(당시 경운궁)과 창덕궁 그리고 주변 지역 일대의 변화도 고찰하였다. 경운궁 서쪽과 북쪽에는 서구 열강의 외교·교육 시설, 남족은 국왕의 친위 기구, 동쪽 상업지역의 급성장 등이 실증되며, 창덕궁 일대가 과거의 기능을 상실한 채 위상이 무너짐을 확인하였다. 전 교수는 이들 자료는 근대식 측량 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기술자가 그린 최초의 근대식 건축도면으로 기존 ‘서양식 건축의 도입사’로 점철된 근대건축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정리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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