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0:15 (토)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
  • 최승우
  • 승인 2022.01.18 1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혜경 지음 | 허광무 사진 | 선인 | 104쪽

한반도 지도와 비슷한 지형을 가진 섬.
일본 에도시대에 금의 섬, 사도는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섬에서 죄수들은 금과 은을 캤다. 광산 생활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에도江戶시대 광부들의 수명은 2?3년에 불과했다고 한다.
2019년 5월 찾은 곳, 사도섬의 아이카와相川 숲속에 빈터.
팻말 하나 없지만 바로 조선인 광부들의 식당이 있던 곳이다. 조선에서 머나먼 이곳에 온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미쓰비시광업 소속 사도광산이 동원한 이들이었다.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인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민중을 동원하던 시기에 사도광산이 동원한 조선인은 최대 1,2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시모야마노가미마치下山之神町의 야마노가미山之神사택, 신고로마치新五郞町의 제1상애료, 스와쵸諏訪町의 제3상애료, 지스케마치治助町의 제4상애료 등 총 4개소의 합숙소와 사택에서 생활했다. 이 식당은 그 가운데 제1 상애료라는 이름의 합숙소에 딸린 식당이다.
조선인들은 합숙소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갱구까지 1시간 반을 걸어서 매일 다녔다. 평탄하지 않고 거친 산길을 오르내린 대가는 부상과 진폐 후유증이었다. 진폐 후유증 사망자가 적지 않은 이유이다.

1601년부터 일본 정권을 위해 금과 은을 캤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 민중을 동원해 구리를 캤던 곳. 사도섬은 지금 곳곳에 세계유산 등재를 바라는 입간판으로 가득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난 듯 보였다.
‘사도금은산-금을 중심으로 하는 사도광산 유산군’.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등재를 준비하는 세계유산의 주제이다. 이 주제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역사가 있다. 반드시 세계시민이 공유해야 하는 완전한 역사Full History.
무엇이 완전한 역사인가. 바로 2~3년을 채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던 일본 전국戰國시대 광부들의 사연이다. 40대 나이에 진폐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아픔이다. 그리고 조선인 강제동원이라는 사실事實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