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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증식하는 ‘소쉬르 문헌학’…진정한 기원은 기원의 부재
무한 증식하는 ‘소쉬르 문헌학’…진정한 기원은 기원의 부재
  • 최용호
  • 승인 2022.01.28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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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소쉬르의 1·2·3차 일반언어학 강의』 페르디낭 드 소쉬르 지음 | 김현권 옮김 | 그린비 | 896쪽

19세기 역사비교언어학 지형도를 바꾼 소쉬르 언어학
소쉬르 문헌학 ‘강의’ 원천은 하나가 아니라 다수로 존재

2021년 10월 22일 그린비 출판사에서 『소쉬르의 1차 언어학 강의』, 『소쉬르의 2차 언어학 강의』, 『소쉬르의 3차 언어학 강의』 세 권의 번역서가 동시에 출간됐다. 이 세 권의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 전,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07년, 1908년~1909년, 1910년~1911년의 소쉬르 강의실로 독자를 안내한다. 

 

6명에서 11명 남짓한 스위스의 제네바 대학 학생들이 「일반언어학」이라는 과목명으로 진행되는 강의를 열심히 노트에 받아적고 있다. 아직 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19세기 역사비교언어학의 지형도를 석사학위 논문 하나로 바꿔놓았던 스승의 강의에 깊이 빠져 있을 뿐이다. 

1913년 2월 22일 스승의 부고와 함께 자신들이 수강했던 강의가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문에 따르면, 출간의 총 책임을 맡은 샤를 바이 교수와 알베르 세슈에로 교수가 소쉬르의 강의 준비 노트를 발견할 수 없어 출간 계획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이에 학생들이 발벗고 나선다. 1차 강의를 수강했던 리들링제가 3권의 노트를 제출했고, 2차 강의를 수강했던 리들링제가 1개의 노트 상자를, 고티에가 6권의 노트를, 부샤르디가 4권의 노트를 제출했으며, 3차 강의를 수강했던 데가이에가 8권의 노트를, 조세프가 5권의 노트를, 세슈에 부인이 1개의 노트 상자를 제출했다. 

 

학생들 노트 첨삭으로 소쉬르 사고를 재구성

바이·세슈에 교수는 방대한 양의 학생들의 노트를 그대로 출간할 것인가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고 책이 요구하는 형식에 알맞도록 과감한 첨삭 작업을 감행하기로 한다. 가장 꼼꼼하게 작성된 학생들의 노트를 참조하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차 강의와 2차 강의는 리들링제의 노트를 참조하고 3차 강의는 데가이에의 노트를 참조하여 소쉬르의 사고를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뒤, 그러니까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드디어 『일반언어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의 운명이 20세기 지성사에 미친 영향력은 여기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지성사적으로 20세기가 1916년에 시작됐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육성으로 들었던 스승의 강의 내용과 스승의 이름으로 출간된 『일반언어학 강의』 사이에 모종의 서어함(틀어져서 어긋남)을 감지했고, 편집과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1957년 로베르 고델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수고 원전』에서 『일반언어학 강의』의 편집과정을 문헌학적으로 철저하게 파헤침으로써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고자 했다. 그 이듬해 1958년 한 학생의 노트가 제나바 대학 도서관에 제출됐다. 2차 및 3차 강의를 수강했던 에밀 콩스탕탱의 노트였다. 이 노트는 바이·세슈에 교수도, 그리고 고델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일반언어학 강의』가 3차 강의 노트를 중심으로 재구성된 것임을 고려할 때 바이·세슈에 교수가 콩스탕탱의 노트를 참조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루돌프 엥글러는 1967년에 출간한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비판본』에서 콩스탕탱의 노트 중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일반언어학 강의』와의 대조를 가능하게 했다. 『강의 비판본』에는 속기사로 일했던 루이 카유의 노트도 포함되어 있다.  

 

스위스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비교언어학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사진=위키피디아

이번 그린비에서 출간한 3권의 책은 바이·세슈에 교수가 처음엔 고려했으나 곧바로 포기했던 계획, 즉 학생들의 노트를 그대로 출간하고자 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학생들의 노트가 예증하듯 『일반언어학 강의』가 20세기의 지성사적 기원이라고 할 때 이 『일반언어학 강의』의 기원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20세기의 진정한 기원은 기원의 부재가 아닐까? 소쉬르 문헌학의 역사가 드러낸 것은 흥미롭게도 하나의 기원이나 기원의 부재가 아니라 기원의 무한 증식이다. 질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20세기 지성사적 기원의 기원, 다시 말해 『일반언어학 강의』의 원천에는 편집자들을 처음부터 당황하게 만든 ‘다수’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수의 양태로 존재하는 소쉬르의 사고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동안 『일반언어학 강의』와 수고 원자료 사이에서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첨예한 형태로 전개됐던 소쉬르 텍스트를 둘러싼 해석의 갈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편견에서 벗어나 소쉬르가 그의 강의실에서 솔직하게 토로한 세기적 고민에 다가갈 수 있었던 학생들의 특권을 나눠 갖는 즐거움과 여유를 누리는 것은 어떨까?

20세기를 연 사건은 아마도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일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지도를 그린 것은 1916년에 출간된 『일반언어학 강의』였다. 소쉬르가 생전에 출간한 책은 석사학위논문과 박사학위 논문 단 두 권이었으며 그가 쓴 논문은 20여 편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평생 20세기의 지도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아마도 역사학자들은 21세기를 연 사건을 2020년에 터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 문득 21세기의 사상적 지도가 언제쯤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해진다. 요즘은 논문을 쓰느라고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에서 위대한 작품은 번역을 부른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이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번역서가 아니라 번역가다. 김현권 교수의 번역은 응답한다는 것이 곧 책임을 지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각 권의 서문에서 그가 제시한 번역어들의 긴 목록은 그가 번역가의 과제를 얼마나 무겁게 떠안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쉬르의 육성 강의를 국내 독자들도 이제 한국어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용호
한국외대 프랑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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