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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3] 가장 민주적이었으나, 반지성적이기도 했던 CNT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3] 가장 민주적이었으나, 반지성적이기도 했던 CNT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1.1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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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티
극단주의를 대표하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 1895~1936)는 앞에서 본 페레와 함께 스페인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특히 스페인내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사진=위키미디어

1911년에 결성된 전국노동연맹(CNT)은 발전 과정에서 파벌을 낳았다. 사용자, 국가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거의 모든 수단을 사용할 준비가 된 극단주의자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극단주의를 대표하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 1895~1936)는 앞에서 본 페레와 함께 스페인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특히 스페인내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철도 노동자 아나키스트 집안에서 태어난 두루티는 아버지와 같이 철도 정비공이 되어 노조에 가입했다. 1917년 8월, 정부가 고용주와 노조간의 합의를 뒤집었을 때 벌어진 파업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에 70여명이 죽고 500여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파업 노동자 2000여명 가량은 재판이나 법적 절차도 없이 투옥되었다. 두루티는 해외로 도망쳤고, 프랑스에서 망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하면서 1917년 가을에서 1920년 초까지 파리에서 기계공으로 일했다.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준군사 조직을 결성하고 1921년, 국왕 암살을 시도 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CNT가 조직되자 바르셀로나에서 조직활동에 종사하면서 추기경 암살에 참여했고 1923년에는 프랑스 인근 국경에서 바르셀로나 병영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남미로 도망쳤다. 이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CNT 내의 전투적 그룹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온건파와 대립했다.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

CNT에서 양 파벌을 하나로 묶은 것은 권위주의적 코뮤니즘에 대한 공통의 반대였다. 192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어느 대표가 혁명적 권력을 구실로 삼은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독재가 러시아에서 생겨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1922년 사라고사 대회에서 CNT는 '바쿠닌이 유지한 제1인터내셔널의 원칙을 확고히 옹호'한다고 선언하고 소련과 연결된 공산주의 제3인터내셔널에서 이탈했다. CNT의 헌장은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CNT의 전투적 문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악의 근원으로 국가를 공격하고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격언으로 정치권력을 비난했다. “모든 권력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기 때문에 혁명적 권력과 같은 것은 없다. 권력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와 권력을 행사하는 자 모두를 부패시킨다.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국가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모든 정복자를 압도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좋은 정치인이란 없고 나쁜 정치인만 있다. 최고의 정부는 정부가 전혀 아니다. 국가는 인민이 아니며 국가도 사회와 동일하지 않다. 사람의 통치 대신에 사물의 통치를 받자. 인간에 대한 평화, 제도에 대한 전쟁,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가 없는 독재이며 프롤레타리아에 반대한다.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의 노조는 당신 자신이다.” 

전국 노동조합연맹과 지역 노동조합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진 프랑스 CGT와 달리 CNT는 처음에는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그것은 모든 노동자를 하나의 공장이나 마을로 모았고 지역 및 국가 차원에서 느슨하게 연합했다. 거기에는 상임자가 없었고 최소한의 행정직원만이 있었다. 관료화를 방지하기 위해 직원은 무급이었고 매년 교대로 근무했다. 모든 결정은 지부 회의에서 바람직하게는 환호로 결정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모든 회원 카드에 인쇄된 CNT의 헌장은 “우리는 개인의 주권을 인정하지만 다수결에 의한 집단적 위임을 수락하고 동의한다. 이것이 없으면 조직도 없다”라고 명시돼있다. 완전한 자치는 연맹의 기초였으며 유일한 연결점은 전국 대회에서 도달한 일반 합의였다. 결의안은 다수결로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마을의 소규모 노조가 도시의 대규모 노조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막기 위해 비례대표제도 사용됐다. 회의의 대표자들은 근본적인 주제를 논의할 권한이 있었지만 개별 노동조합의 국민투표에 동의한 제안을 제출해야 했다. 조합원들은 언제나 대표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 그들을 해고할 수 있었다. 

 

CNT에서 분열 조장했던 FAI, 스스로도 분열하다

1927년 망명 상태에서 결성된 극단적인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Federacion Anarquista Iberica: FAI)은 CNT의 중요한 위원회와 사무국을 장악하기 위해 뭉친 느슨한 그룹에서 시작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스페인 노조 조직으로서 CNT는 가장 민주적인 조직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나키적 구조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처음에는 임금노동자와 사용자만 가입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자영업자, 협동조합 조합원, 특정 기술자 및 지식인은 제외되었다. 그 혁명적 추진력은 또한 반지식인적 경향이 있었다. 회원 카드에 인쇄된 헌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됐다. “회의에서 철학적 토론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반혁명적이다.” 노조는 또한 조직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CNT의 고도로 분산된 구조는 매우 탄력적이었다. 1923년부터 1930년까지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의 독재 기간 동안 지하로 내려간 뒤, 그것은 대체로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나타났다. 1931년 마드리드 대회에서 CNT내의 온건한 경향은 프랑스 CGT와 마찬가지로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을 도시 연합으로 묶은 지역 조합에 더해 각 산업 분야의 국가 연맹을 결성하자는 제안을 했다. 

동시에, 1927년 망명 상태에서 결성된 극단적인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합’(Federacion Anarquista Iberica: FAI)은 CNT의 중요한 위원회와 사무국을 장악하기 위해 뭉친 느슨한 그룹에서 시작했다. 그 의도는 개혁파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FAI의 모든 아나키스트가 CNT의 구성원인 반면, CNT의 모든 구성원이 아나키스트인 것은 아니었다. CNT에서 FAI의 혁명과 운동에 대한 사상을 거부한 자들은 추방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적어도 1932년부터 스페인 노동운동의 반 이상이 헌신적인 아나키즘 측에 의해 계도됐다. 그리고 FAI는 CNT의 온건한 지도자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 중 30명이 준비되지 않은 봉기, 폭력을 위한 폭력, '혁명 신화'를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다. 온건파는 떠나면서 FAI의 독재를 비판하고 그들 자신의 반대조합을 형성했지만 6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FAI는 또한 산업별 조합에 의해 운영되는 계획 경제를 제안한 세력부터 코뮌의 자유 연합을 옹호하는 집단 같은 다양한 경향으로 분열되었다. FAI는 1936년 내전이 시작될 때까지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상당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3만 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들은 내전동안 교회를 불태우고 성직자와 매춘부를 즉결 처형하는 것을 옹호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이 무신론 투사들을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들은 종교개혁의 청교도 종파가 느끼는 조직화 된 종교에 대한 증오의 일부를 의심 할 여지없이 공유했다. 반대자들은 몬세냐가 CNT에서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고 비난했지만 실제로는 중앙 권력이 없었고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두 조직이 동의했다. 

 

‘아나키즘-볼셰비즘’이란 얇은 선을 걸었던, FAI

머레이 북친은 미국의 사상가로 아나키즘 과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입장을 견지한 작가이다. 사진=위키미디어

FAI는 혁명을 주도하고 CNT를 지휘하기 위해 연대 그룹을 사용하는 전술에서 '아나키즘-볼셰비즘' 이론을 채택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도 FAI의 반도 위원회가 볼셰비키식 중앙위원회와 단순한 행정기관 사이의 '매우 얇은 선을 걸었다'고 인정했다. 그것은 공화국 수립 이후 법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내전 직전까지 그 구성원을 신중하게 선별한 비밀 조직으로 남았다. 

그러나 FAI의 연대 그룹은 분명히 전위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상호 공감과 이념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자유 결사체였다. 엄격한 원칙과 계층제라는 점에서 그들을 공산당 조직과 비교할 수 없었다. 친밀감과 함께 그들은 대가족과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주도로 행동했다. 그래서 권위주의적 좌파 사이에서 통제 불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CNT와 같이 FAI는 연방 노선을 따라 조직되었으며, 위임된 반도 위원회는 정책을 만들기보다는 일반적인 합의를 실행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즘과의 차이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 본질을 잘못 판단하여  CNT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수레의 '5륜구동'이라고 불렀다. 

1930년대 초반, 레반테, 안달루시아, 카탈루냐에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와 같은 무장 반란 단체를 세우려는 아나키스트들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곳은 헤레스 근처의 작은 마을 카사스 비에하스였다. 소규모 지역 아나키스트 그룹은 시민 경비대를 가두고, 붉은색과 검은색 깃발을 펼치며 격심한 전투를 치른 후에 모두 살해되었다. 사회적 불안은 더욱 격렬해지고 널리 퍼졌다. 1932년 세비야에서 총파업이 시도되었고 1933년 바르셀로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CNT가 주도한 기권 캠페인의 결과로 1933년 선거에서 공화당-사회주의 스페인 연정이 패배했다. 대안은 특히 아라곤(Aragon)과 리오하(Rioja) 지역에서의 더 많은 파업과 반란이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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