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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2] "친구들이여, 잘 조준하시오", 평화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2] "친구들이여, 잘 조준하시오", 평화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1.03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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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미셸
엘리제 르클뤼
폴 로맹
프라너칸 신부
프란시스코 페레(Francisco Ferrer, 1859~1909)
사진=위키미디어

스페인 아나키스트 중에서 처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사람은 근대 학교 운동을 창시한 프란시스코 페레(Francisco Ferrer, 1859~1909)다. 바르셀로나 부근 농촌에서 태어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와 달리 자유사상가인 삼촌과 첫 직장에서 무신론자인 고용주에게 독립적이고 반종교적인 신념을 배웠다. 당시 그와 같은 젊은 지식인들은 아나키즘의 전투적 무신론과 반항 정신, 인간의 선함과 진보에 대한 확신에 매료돼 20대 중반인 1883년까지 프리메이슨이자 급진적인 공화당원이었다. 프랑스와 바르셀로나 사이를 운행하는 기차 차장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그는 망명한 공화당 지도자인 마누엘 루이즈 조릴라와 정치적 난민들을 보호소로 보낼 메시지를 전달했다.

1885년 공화파 봉기의 실패 후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16년 동안 머물면서 페레는 파리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와인을 위탁 판매했다. 루이즈가 189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비서를 지냈으며 진보적 운동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옹호파로 활동하기도 한 그는 런던에서 1896년에 열린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대표로 참여했고 프리메이슨 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했다. 루이즈의 사망 이후에는 아나키즘 운동에 적극 참여해 당대 프랑스 아나키즘을 대표한 아나키스트인 루이즈 미셸, 엘리제 르클뤼, 세바시트안 포래와 친교했고 샤를 말라토와 장 그라브의 친구가 되었다.

나아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인 알셀모 로렌조와 페르난도 타리다 델 마르몰(Fernando Tarrida del Marmol)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페레를 감동시켰고 1890년대 후반까지 그들과 깊은 동류의식을 느꼈다. 나중에 정부의 감시가 가장 강력했을 때 그는 아나키스트 운동 개입을 부인했지만, 아나키즘의 역사가 폴 에버리치(Paul Avrich)는 역사가들이 그를 혁명적이라기보다는 평화주의자나 이상주의자로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레의 아나키즘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 

 

“아이가 가진 능력을 키워주는 것 이외의 목적이 교육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페레는 평생 여러 나라에서 아나키스트 대의를 위해 일했고 다른 아나키스트 작업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아나키스트 책을 출판했다. 바르셀로나의 많은 소규모 아나키스트들은 나중에 페레가 개교한 학교에서 일했으며 유럽의 가장 저명한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그를 위해 조언하고 글을 썼다. 

파리에 있는 동안 페레는 특히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아나키스트와 합리주의 집단에서 뜨거운 주제였다. 페레는 파리 근교의 셈피(Cempuis)에 있는 폴 로맹(Paul Robin, 1837~1912)의 프레보스트(Prevost) 고아원 학교에 매료되었다. 로뱅의 남녀공학 통합 프로그램은 강제 없이 어린이의 신체적, 지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는 사회 경제적 환경이 유전보다 아동의 발달에 더 큰 역할을 한다고 믿었으므로 그의 학교는 특히 일반적으로 낙인을 받는 아동에게 자연, 운동, 사랑 및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01년에 페레가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스페인은 3년 전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한 뒤의 반성기에 있었다, 특히 국가 교육과 관련하여 자기반성이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일부 진보파들은 새로운 과학적, 역사적, 사회적 내용과 교구 감독관에게 종속되지 않는 교사가 포함된 보다 세속적인 교육을 원했다. 페레는 스페인의 종교적 교리와 의무 수업 중심의 학교가 아닌 세속적이고 아나키적인 바르셀로나 현대 학교(Escuela Moderna)를 설립했다.

프란시스코 페레는 최초의 자유학교인 ‘모던 스쿨’을 설립(1901)하고 운영한 교육자로 유명하다. 그가 세운 자유학교는 영국의 서머힐 학교보다 한 세대 앞선 것이었으며, 아동 중심교육을 강조하였다. 사진=위키미디어

제자 뫼니에가 남긴 거액의 유산으로 설립된 그 학교는 18세기 합리주의와 19세기 낭만주의의 전통에 입각하여 아이들을 순응, 규제, 규율이 아니라 자유를 맛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 크로포트킨, 톨스토이를 포함한 교육학자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 학교는 처벌, 보상 및 시험을 피하고 학업보다 실제 경험을 장려하고 학교를 남녀공학으로 운영하며 남녀평등을 강조했다. “아이가 가진 능력을 키워주는 것 이외의 목적이 교육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그는 ‘국가에 이로운 국민이 될 수 있는가’라는 잣대로 유능한 아동과 무능한 아동을 구별하지 말고 사회와 국가의 책무는 아이들을 가르쳐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1901년 9월 개교 당시 학생 수는 30명이었으나, 5년이 지난 1906년 정부에 의해 폐쇄당했을 때는 126명이었다. 교사들은 페레의 교육이념에 맞추어 자본주의, 국가, 군대에 반대하는 40권이 넘는 교과서를 개발했다. 페레의 교육사상은 스페인과 남아메리카 전역에 퍼졌고, 그의 교육철학은 슈타이너, 프라너칸 신부, 프레네, 마카렌코, 닐 등 자유교육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페레의 교육사상을 연구하고 있으며, 미국에는 페레협회가 있다. 

페레는 당시에 두드러지게 성장한 노동자 공동 소유의 철학인 아나코 생디칼리즘의 원칙에 입각하여 <총파업>(La Huelga General)을 간행하고, 카탈로니아 노동운동의 조직과 활동에 기여했다. 1905년에는 투우에 반대하면서 투우를 정치적 민족주의의 조장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지배층은 페레의 학교를 반란 활동의 하나로 보고 1906년 스페인 왕에 대한 암살 시도에 연관시켜 페레를 구속했다. 

1901년 11월 15일 바르셀로나에서 교육자 Francisco Ferrer는 자유지상주의 신문 "La Huelga General"의 첫 번째 번호를 발행했습니다. 사진=위키미디어
프란시스코 페레는 1901년 11월 5일 자유지상주의 신문 <총파업(La Huelga General)>의 첫 번째 번호를 발행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사법, 평화적 아나키스트에게 살인을 저지르다

1년 후 국제적 압력으로 무죄로 풀려났고 페레는 스페인 혁명 운동의 옹호자로서 유럽 수도를 순회했다. 그 뒤 학교를 다시 열지는 못했지만 언론 활동을 하고 아동교육을 위한 국제연맹 설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1909년 중반 바르셀로나의 ‘비극의 주간’(Semana Trdgica)으로 알려진 1주간의 반란을 조직한 혐의로 다시 체포·기소돼 처형되었다. 처형 직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친구들이여, 잘 조준하십시오. 당신들은 책임이 없습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현대 학교 만세!" 처형 직후 그것에 항의하는 집회가 세계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반란에 페레가 기여한 바는 미미했다는 점이 뒤에 밝혀졌고 페레의 처형은 ‘사법살인’으로 비난되었고 그는 순교자로 추앙되었다. 

나는 페레의 평전을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낸 적이 있다. 그 2년 뒤에 어느 탈랜트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썼지만 이는 페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책이다. 그 작가는 제목이 유사한 점에 대해 나에게 사과전화를 해왔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이든 누구든 인간에 대한 폭행에 반대하는 책이면 많아서 나쁠 것이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나는 저작권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이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페레는 폭력에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1890년대 초 스페인에서도 아나키스트 폭탄 테러와 암살이 급증했으며, 이에 따라 잔인한 정부의 탄압이 발생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곧 테러로는 국가를 전복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고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선전으로 눈을 돌렸다. 세기의 전환기에 산업 불안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프랑스 CGT의 성공에 영감을 받아 카탈루냐의 노동조합은 1907년에 ‘노동자연대’(Solidaridad Obrera)라는 생디칼리스트 조합을 조직했다. 이 조합은 이듬해 첫 대회를 개최했다. 정부가 1909년 모로코 리프에서의 전쟁을 위해 카탈루냐에서 징병을 요구했을 때, 노동자연대는 총파업을 선언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거리 전투가 발생했으며 이후 ‘비극의 주간’ 동안 약 20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했으며 많은 교회가 불탔다. 그 뒤를 이은 무자비한 보복으로 페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바르셀로나에서의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 여파로 노동조합은 더 강력한 조직을 만들 필요성을 인식했고 1911년 세비야에서 열린 대회에서 전국노동연맹(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 CNT)이 결성되었다. 1868년 이래 스페인에 존재했던 제1인터내셔널의 후계자를 자처한 CNT는 1914년까지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으나 5년 만에 회원 수는 1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주요 활동 기간인 1917년에서 1923년 사이에 스페인 전역에서 혁명 파업을 조직해 거의 내전을 방불케 했다. 좌파와 우파의 총잡이들은 거리,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총을 쏘고 복수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CNT는 프랑스의 CGT와 같은 딜레마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목표로 함과 동시에 단기적으로 구성원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전념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 CNT 대회에서는 전년도 카탈루냐 노동조합의 지역 대회에서 제안한 대로 아나키 코뮤니즘 원칙을 기본 이념으로 채택했다. 또한 '순수한 경제 분야, 즉 정치적 또는 종교적 편견에 얽매이지 않은 직접적인 행동에 의한 투쟁'을 약속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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