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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1] 국가를 흔들었던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1] 국가를 흔들었던 스페인에서의 아나키즘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2.28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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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세스고 피 아이 마르갈
조지 오웰
알젤모 로렌조
프루동
『토지와 자유』

2020년에 스페인 아나키즘에 대한 국내 최초의 연구서인 황보영조 교수의 『토지와 자유』가 출간되었다. 황보영조 교수는 오랫동안 스페인 내전을 비롯한 스페인 현대사를 연구해온 역사학자다. 그 책은 한 나라의 아나키즘에 대한 국내 연구서로서도 최초의 책이다. 외국에서는 각국의 아나키즘에 대한 책들이 일찍부터 많이 나왔지만 국내에서는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국내에는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보다도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나 독일 등의 현대사 연구자들이 훨씬 많을 터인데 스페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아나키즘 운동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다른 나라의 아나키즘 운동이 스페인에서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 밖 다른 나라에서 아나키즘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 운동사가 이제 막 나온 만큼 다른 나라나 지역의 아나키즘 운동사도 계속 나올 것이고 나와야 한다.

스페인 아나키즘은 지금까지 여러 책과 영화로 소개되어왔다. 아마도 1983년에 번역돼 나온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처음일 것이다. 오웰은 『동물농장』이나 『1984』에 비해 매우 늦게 소개된 그 책을 토대로 한 캔 로치의 영화 「랜드앤프리덤」이 1995년에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에게 스페인내전에 대한 인식을 처음으로 심어준 것이 그 영화일 것이다.

오웰의 소설 이전에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도 일찍이 소개되었지만 아나키즘에 대한 소개로는 오웰의 소설에 미치지 못했다. 그 작품을 영화화한 게리 쿠퍼 주연의 1943년 작품도 마찬가지다. 헤밍웨이나 오웰의 소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캔 로치의 영화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세력은 비판적이었지만, 소련의 배신으로 인해 아나키스트를 중심으로 한 민병대가 프랑코 군대에 패배했음은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배경은 스패인 내전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는 로치 작품 전후로 주로 스페인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나 한국에서 상영된 것은 거의 없다. 그 중에서 특히 소개할만한 작품으로는 여성 아나키스트들이 주인공인 「프론트라인」(1996), 어린이의 눈으로 내전을 다룬 「마리포사」(2001), 환상적인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5), 달리, 부뉴엘, 로르카를 다룬 「리틀 애쉬」(2008), 피카소 걸작의 배경을 다룬 「게르니카」(2016) 등이다.

나는 2002년 스페인 아나키스트 교육자인 페레의 평전을 썼다. 한국인이 쓴 스페인 아나키스트에 대한 평전으로서는 최초의 책이다. 그 책을 내기 3년 전, 두루티의 평전인 엔첸스베르거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이 나왔다. 두루티와 함께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아버지를 만화로 그린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2013년에 나왔다.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는 아나키즘에 공명한 주인공이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어 프랑코 군대와 싸운 이야기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권위 있는 역사서인 안토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2009)도 나왔지만 더 흥미로운 책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오웰과 헤밍웨이는 물론 여러 시민들을 다룬 『스페인내전-우리가 그곳에 있었다』(2017)이다.

조지 오웰은 필명이고 그의 실제 이름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이처럼 많은 책과 영화가 나올 만큼 스페인은 아나키즘이 주요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국가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자치와 연합이라는 아나키즘 원칙은 독립 코뮌의 오랜 전통을 가진 스페인 사회에 적합했다. 코뮌은 그들 자신의 헌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자신의 푸에로(지역법)을 만들었다. 코뮌은 자치적 유기체로 간주되었다. 고야의 판화에서 볼 수 있듯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적 폭력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나키즘은 다른 곳보다 스페인에서 더 폭력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불안이란 정치적 옥토에서 크게 성장한 아나키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까지 스페인은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계급대립이 뚜렷했다. 군대와 교회의 지지를 받는 도시의 지배계급은 대부분 지주들이고, 노동민중의 대다수인 농민들은 농촌에서 살았다. 노골적인 계급증오는 1930년대까지 유격전으로 표출되었는데 그것은 농민봉기로 폭발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은 예언적이며 어느 정도 천년왕국의 성격을 보이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그것을 종교적인 성격으로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아나키즘은 사회 억압의 원인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농업의 빈곤과 산업적 소외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민중 문화에 뿌리를 두었으며 땅과 자유, 빵과 정의, 교육과 자유에 대한 인민의 열망을 새로운 형태로 표현했다. 동시에 스페인 아나키즘은 문화와 생활방식을 강조했고 교회와 국가의 전통적 굴레로부터 일상을 자유롭게 추구했다. 경제가 빈곤한 시기에 성숙하여 때때로 다소 청교도적인 변형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많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의 강한 도덕적 감각은 고리대금과 낭비를 거부하도록 이끌었지만 그들은 또한 자유로운 사랑과 자유로운 탐구를 장려했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고자 일부 사람들은 단순한 복장, 채식주의 식단, 나체주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그들은 잘 조직되고 효율적이면서도 자발성과 주도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집단적 연대에서 이념적 유대뿐만 아니라 우정과 공생에 더 중요한 기반을 둔 조직의 형태를 개발했다. 

19세기 중반에 연방당의 지도자가 된 카탈로니아 출신의 은행원이자 시인인 프란세스코 피 아이 마르갈(Francisco Pi y Margall, 1824~1901)은 이 전통을 확고하게 고수했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헤겔의 원칙에 영감을 받아 프루동의 저술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그는 자치 코뮌을 기반으로 한 연방 사회를 옹호했다. 1854년에 낸 『반동과 혁명(La Reaccin y la revolucion)』에서 그는 “나는 권력을 나누고 세분화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변경 가능하게 만들고 그것을 계속 파괴할 것이다”라고 썼다. 그 책은 스페인 급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1873년 제1공화국의 2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정교분리와 8시간 노동제 등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도입하고자 했으나, 한 달 만에 사임해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스페인 아나키즘의 주도적인 정신으로 여겨졌다. 

프란세스코 피 아이 마르갈(Francisco Pi y Margall, 1824~1901)은 스페인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프란세스코 피 아이 마르갈(Francisco Pi y Margall, 1824~1901)은 스페인 공화국의 대통령이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토지 분배를 꿈꾸며 아나키즘을 키웠던 스페인의 농민들

1868년 9월에 이사벨라 여왕을 추방한 군사 혁명이 터지자 바쿠닌은 새로 결성된 제1 인터내셔널의 비밀 결사인 국제사회주의자-민주주의 연맹의 지지자를 확보하기 위해 르클뤼를 비롯한 사절단을 스페인에 보냈다. 1866년 바쿠닌을 만난 이탈리아인 주세페 파넬리(Giuseppe Fanelli, 1827~1877)는 스페인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에 제1 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부를 세웠다.

그는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바쿠닌의 반권위주의적 집단주의에 대해 몇몇 학생과 노동자들을 설득했다. 바쿠닌주의를 확고하게 유지한 인터내셔널 스페인 지부는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방향으로 발전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은 농촌 빈민들 사이에 빠르게 뿌리를 내렸다. 바쿠닌의 혁명이론이 현실적인 힘을 확보하고 노동조합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다수가 된 유일한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이 "스페인 아나키즘의 할아버지"라고 부른 엄격한 인쇄업자 안젤모 로렌조(Anselmo Lorenzo, 1841~1914)는 파넬리와 프루동에게서 영감을 받아 순회 사도로 마을에서 마을로 아나키즘 메시지를 전달해 지역에서 혁명적 봉기가 터져 나올 수 있게 사람들을 일깨웠다. 마을에서는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아나키즘 불을 계속 지폈다. 농민들은 지주, 성직자, 경찰의 권위가 소멸 되는 날의 토지 재분배를 꿈꿨다.

안셀모 로렌조
안젤모 로렌조. 사진=위키미디어

그러나 안달루시아와 레반테의 가난하고 약탈당한 사람들만이 아나키즘이 퍼질 비옥한 토양이 아니었다. 아나키즘은 카탈루니아와 오비에도의 광산 지역, 나아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마드리드와 같은 대도시의 가장 진보된 노동자들에게도 수용될 만한 것이었다. 아나키즘은 노동자 농민만이 아니라 문화와 교육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젊은 파블로 피카소도 세기의 전환기에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다. 

이처럼 스페인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발전이 이룩한 물질적 진보에 대한 깊은 저항의 표출이다. 또한,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거쳐야 한다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도식을 폭력적 진보로 보고 거부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가 이룩한 성과도 거부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선진 유럽의 상품물신주의나 자본주의적 발전의 합목적성도 내면화하지 않고 비인간적인 그것이 낳은 소외에 대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아나키즘적 비전을 추구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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