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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대학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들의 대학은 어디에 있을까
  • 양진오
  • 승인 2021.12.29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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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25. 끝

코로나19 팬데믹은 대학이라 불리는 고등교육체제의 작동 방식의 정당성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캠퍼스 중심, 강의실 중심의 대학체제를 뒤흔든 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더욱 근본적으로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대학은 과연 필요한가?

겨울바람이 매섭다. 살갗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의 냉기가 예사롭지 않은 12월이다. 이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위로한다. 그래도 봄은 올 거라고. 봄은 올 거다. 기어코 봄은 올 거다. 그런데 그 봄이 오면 이런 기사가 포털 뉴스를 도배하지 않을까. 벚꽃이 피는 순서대로 문 닫는 대학이 나올 거라는 그 기사 말이다. 

그래서일까, 봄이 영 봄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과연 우리나라 대학에 봄다운 봄이 올지 장담하기 어렵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대학은 더 그렇다. 벚꽃이 피는 순서대로, 이런 제목으로 나오는 기사마다 망해도 싸다는 댓글, 아직도 문 닫지 않았느냐는 댓글이 빼곡하다. 우리나라 대학, 특히나 비수도권 지역대학은 12월이든 꽃 피는 봄이든 매한가지 처지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식의 대학입시 성공 여부가 부모의 절대적 의무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대학의 인기가 항상 상종가를 칠 거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특히 비수도권 지역대학은 더 그렇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더 물어야 한다. 바로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지역대학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지역대학에도 호시절이 있었다. 학령인구가 폭발하던 1970~1980년대가 그때가 아닐까. 아니 1990년대에도 지역대학의 사정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않다. 앞으로는 사정이 더 악화될 거다. 

오늘날 대학은 과연 필요한가?

그렇다면 수도권 대학은? 상대적으로 수도권 대학은 비수도권 대학에 비해 사정이 괜찮을 거 같지만 꼭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대학의 존재 이유를 그 근본에서부터 회의한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은 대학이라 불리는 고등교육체제의 작동 방식의 정당성에 대해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아직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캠퍼스 중심, 강의실 중심의 대학체제를 뒤흔든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더욱 근본적으로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대학은 과연 필요한가?

이명박정부로 기억된다. 아마도 그 시절부터 교육부가 대학들을 상대로 대학평가체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나 싶다. 대학평가체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명칭을 달리하며 그 독한 목숨을 연명해 왔다. 그 재정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등록금 동결을 강요받는 대학들마다 사생결단의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총장이나 대학본부나 평가에 따른 정부재정지원사업 선정을 자신들의 업적으로 치환하다보니 대학마다 난리법석이다. 

그런데 대학평가체제의 맹점이 있다. 그 기준이 일률적이라는 게 맹점이다. 그렇다 보니 대학평가에 따른 대학혁신의 결과가 이 대학 저 대학 썩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평가체제가 우리나라 대학을 닮은꼴 대학으로 양산해 왔다. 마치 대학의 존재 이유가 대학평가 선정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있어 보인다. 

대학평가만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한국의 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 상황에서도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한 모습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마치 도심이나 그 외곽에 태어난 뉴캐슬 같다. 고급해 보이는 디자인의 도서관, 기숙사, 학생 편의 시설 등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대학들이 꽤 괜찮아 보인다. 그렇지 않은 부실대학도 있겠다 싶지만, 한국의 대학들이 전반적으로 외형적 성장을 거듭한 건 사실이다. 

한국문화의 인기가 해외에서 크다는데 그래서인가 외국인 유학생의 입학은 꾸준하다. 대구대도 그렇다. 베트남 학생이 꾸준히 입학하더니 지금은 다시 중국인 유학생이 입학하고 있다. 이게 어디 대구대만의 현상일까. 한국 대학의 해외 교류가 참으로 활발하게 증가하는 추세이다.

학생들과 함께 부산 초량 이바구길 답사하는 장면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원도심인 초량 이바구길을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며 지역 스토리텔링의 사례를 체험 학습했다. 사진은 2019년 5월 10일 촬영. 사진=양진오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는 지역에서 찾아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수도권이든 비수도권이든 한국 대학의 사정이 좋다 싶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의 존재 이유다. 대학은 도대체 왜 필요할까? 이런 질문이 한가하다 말할 수도 있겠다. 2030년에 대학의 절반이 사라질 거라는 예고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터에 대학의 존재 이유를 환기하는 질문은 한가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의 절반이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특히 지역대학은 더 그렇다.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는 대학평가체제나 그 외형적 성장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는 지역과의 지학협력에서 찾아야 한다. 더는 지역대학의 캐치프레이즈가 취업률 1등 대학이니 세계를 선도하는 인재 양성이니 하는 황당한 표현으로 장식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는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바로 그 토대에서 지역대학의 비전이 그려져야 하는 게 상식이다. 

창원대 특강 장면이다. 특강 의뢰가 오면 마다하지 않는다. 특히 지역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은 더 그렇다. 사진=양진오

지역대학과 지역의 관계가 참으로 소원하였다. 이제 그 소원한 관계를 청산할 시간이 오고 있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들의 꿈, 지역의 탄생과 형성 배경, 지역의 성취와 한계, 지역대학의 지향과 정체성 등을 우리는 치열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러면서 지역대학이 그 지역에서 환영받고 지지받는 방법과 지역이 지역대학을 환대하며 협력하는 방법을 탐문하며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도 대구 원도심을 걷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들의 거리가 곧 대학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원도심과 대구 경북의 산하를 걷고자 한다. 그 경계가 넓혀진다면 그 외부로도 걷고자 한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만난 학생, 청년들과 함께 우리들의 대학을 토론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어떤 배움이 필요한가를 모색하고 공유하고자 한다. 지난 1년 <교수신문>에 ‘거리의 대학’을 연재하며 다시금 지역대학의 존재 이유를 성찰할 수 있었다. 아직은 미완성인 거리의 대학 실험이 더 알찬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양진오 대구대 교수·한국어문학부
한국 현대문학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대구 원도심에 인문학 기반 커뮤니티 공간 ‘북성로 대학’을 만들어 스토리텔링 창작, 인문학 강연 및 답사, 청년 창업 컨설팅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필자와 애독해 주신 독자분들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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