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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진흥원’ 설립…인문사회 요구를 국정과제로
‘한국학술진흥원’ 설립…인문사회 요구를 국정과제로
  • 박구용
  • 승인 2021.12.2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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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오늘을 말하다 ⑪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에 바란다 - 끝

시대가 학문 분야 간 소통과 협업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고, 소통과 협업의 선결요건은 학문의 균형발전임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는 여전히 심각한 소외와 격차 속에 방치되고 있다. 학술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기관이나 심의 자문기구는 물론이요, 대학의 ‘학술연구’를 뒷받침할 전문법령조차 전무한 것이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의 실상이다.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가 스스로의 본령을 지키고 학술연구의 공공성과 사회적 기여도를 높일 기반 확립이 시급하다.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는 앞으로 11회에 걸친 기고를 통해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 연구와 교육의 현황과 전망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정부와 국회의 가시적 조치를 촉구하고자 한다.

단반향으로 전달되는 공론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 필요
기초연구·학문은 이공분야와 인문사회 문화예술도 포함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이하 인사총)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모든 사람과 기관이 참여하는 대표적 공론장이다. 인사총은 공론을 통해 모아진 의견과 의지를 국가기구와 사회에 전달하고 구체적 실천의 길을 모색하는 전달자이자 증폭자(enhancer)이기도 하다. 

인사총은 <교수신문>과 함께 공론을 모으고 있다. 필자는 한 명의 연구자이자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 본부장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이제 거꾸로 인사총에 바람을 말하고자 한다.

 

지난 3월 30일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가 출범하며 인문사회 관련 법과 진흥 기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학술토론회를 열었다. 사진=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 토론회 장면 캡처

인문사회연구 본부장은 정책을 구상하거나 실천하기 위해 관련된 기관의 대표들과 만남과 소통, 그리고 연대를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대학사회(학회)를 연결하고 서로 다른 말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바르게 옮기는 번역기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연구재단의 번역기는 정부의 언어를 대학으로 옮기는 한 방향 전달에 멈추는 경우가 많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뿔뿔이 흩어진 기관들은 그때그때 생겨난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해왔지만 정작 큰 틀에서 기초를 바로 잡는 공론을 형성하기 어려웠다. 인사총은 이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던 공론의 흐름을 양쪽 방향으로 바꾸는 데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교육부 학술진흥과 공무원 10명과 백년대계

올해 초 출범하면서 인사총은 네 개의 과제를 설정했는데, 지금 유효한 과제는 다음 세 가지다. ① 법 정비와 국가 학술자문회의 설치 ② 학술정책연구 전문기구 설립 ③ 인문사회 분야 연구개발 예산증액. 법부터 따져보자. 현재 관련 실정법은 ‘학술진흥법’이다. 이 법에 ‘학술’이란 학문의 이론과 방법을 탐구하여 지식을 생산·발전시키고, 그 생산·발전된 지식을 발표하며 전달하는 학문의 모든 분야 및 과정을 말한다. 이 법에 따르면 교육부 장관은 학술진흥을 위한 정책수립, 법령 개선, 기반구축, 재원확보, 지원의 책임자다. 그런데 지금 누가 이 일을 하고 있는가?

학술정책의 기본방향을 정하는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해서 독단적으로 결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이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인 교육부의 학술진흥과 공무원은 10명 남짓이다. 이 조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정해진 사업을 이리저리 짜 맞추며 사방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뿐이다. 학술정책 백년대계는커녕 10년 기획도 어렵다. 도대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학술진흥 관련 전문연구 기관으로서 ‘한국학술진흥원’(가칭)을 설립하고 이 일을 맡겨야 한다. 이를 위해 인사총은 ‘학술정책 수립 국회토론회’도 열고 청원서도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정청래 의원 도움으로 ‘기초학술기본법’ 발의도 이끌었다. 이 시점에서 인사총은 보다 촘촘하게 다음의 질문에 대답하며 공론장에서 정치적 에너지를 키워야 한다. “‘학술진흥법’이 있는데 왜 다른 법을 만들죠?”, “한국연구재단을 두고 또 다른 기관을 만들어야 하나요?”

 

인문사회 연구비는 전체 1.5%에서 계속 하락

과학기술계는 자신들의 특수성을 근거로 다양한 법률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수십 개의 독립 기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반면 인문사회계의 특수성에 기반을 둔 법률이나 기관은 단 하나도 없다. 그 결과 인문사회계의 연구비는 전체의 1.5% 이하로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희한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로 ‘기초연구비 2배 상향’을 내세웠다. 쉽지 않은 과제였는데 일본의 무역보복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쉽게 달성했다. 전체 연구비는 2배가 늘었는데 인문사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줄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초연구비 2배’에서 인문사회는 빠진다.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인문사회도 기초학문이다. 그러니 기초연구비 지원을 받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행정부는 자신들만의 용어를 쓴다. 2005년 ‘학술연구조성사업’은 ‘기초연구’를 이공분야만 해당하는 것으로 못박는다. ‘기초연구’는 과학기술의 것이고 ‘기초학문’은 인문사회, 그리고 과학을 포괄한다. 따라서 ‘기초연구비 2배’라는 멋진 정책과제 덕분에 넘치는 연구비가 과학기술 분야의 무능한 연구자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갔다. 반면 인문사회계의 경우 탁월한 학문후속세대조차 생계 고민 때문에 학계를 떠나고 있다.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옛 마을처럼 인문사회계는 불임 난산으로 점점 생산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문사회계의 후속세대 생산능력 상실은 이 나라 전체의 학술생태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몸은 세계를 앞지르며 뛰고 있는데 머리는 그 속도를 못 맞추고 곧 떨어져나갈 처지다. 글로벌 K-콘텐츠가 그나마 머리와 몸을 아슬아슬하게 연결하고 있지만 그 힘마저도 곧바로 소진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학술진흥법’은 1979년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1981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이 만들어졌다. 학진은 전 학문분야의 기초학술 진흥을 주도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교육부와 과기부를 통합하면서 과학재단과 함께 학진까지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한다. 통합 후 한국연구재단을 대표하는 역대 이사장은 모두 과학기술분야 전문가들이다. 7명 모두. 우연일까? 과학기술 연구자가 인문사회 연구자들보다 학술정책과 시행에서 확실히 더 전문적인가?

몸과 머리, 말로는 분리되지만 실재는 하나다. 과학기술과 인문사회도 마찬가지다.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학술정책의 기본방향과 정책을 수립할 한국학술진흥원과 관련 학술기본법을 다음 정부에서는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기초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기초연구가 되어야 한다. 다음 정부 5년 안에 인문사회 학술 예산 1조 원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사총에 바란다. 다음 정부가 인문사회계의 요구를 정확하게 국정과제에 담을 수 있도록 서둘러 정치적 공론을 형성해야만 한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막대한 정부지원을 받아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직 아무런 지원도 없는 인사총은 건강한 시민과 연구자들의 의견과 의지를 모아 국정을 바로 세우는 길밖에 없다. 그 어느 때보다 서두를 시간이다.

* 이번 호로 ‘인문사회 오늘을 말하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와 수고해 주신 필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에서 「자유, 인정, 그리고 담론」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광주시민자유대학 이사장이다. 저서로 『우리 안의 타자』, 『부정의 역사철학』, 『아토포스 광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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