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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상담은 지향한다…“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죽지 않았다”
애도 상담은 지향한다…“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죽지 않았다”
  • 김재호
  • 승인 2021.12.23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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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여섯 밤의 애도』 (한겨레출판사 | 298쪽) 쓴 고선규 박사

완전한 회복은 상실 이전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순간
대학평가에서도 연구역량·취업률과 더불어 학생 정신건강도 살펴야

“애도는 회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발견의 과정인지도 모르겠다.”(251쪽) 최근 『여섯 밤의 애도』를 펴낸 고선규 박사는 책에 이같이 적었다. 자살 사별자들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고 박사는 자살 유족들을 만나 애도모임을 이끌어왔다. 앞으로도 여성, 청소년, 부모 사별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지난 5일, 고 박사를 서면 인터뷰했다.

 

고선규 박사는 애도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고선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할 것일까? 고 박사는 “‘완전한 회복’이 상실 이전의 ‘나’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며 “롤랑 바르트(1915∼1980)의 말처럼 애도는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라고 답했다. 아울러, 그는 “롤랑 바르트는 이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비타 노바(vita nova)’라고 명명하기도 했다”라며 “비타 노바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가 불러일으키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고 박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는 죽지 않았다. 그 사람을 지우지 않고 내가 이어가는 삶에서 그 사람을 기억하며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애도 상담에서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여섯 밤의 애도』에는 5명의 자살 사별자가 가명으로 등장한다. 그 주인공들은 원이, 민이, 선이, 영이, 경이다. 이들은 고 박사가 이끄는 자조모임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 과정은 여섯 번 이뤄졌다. 모두 참석한 이들도 있고 사정으로 중간에 빠진 이도 있다. 이 모임에서 자살 사별자들은 각자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죽음의 이야기(원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일지, 알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이에 대해 고 박사는 “애도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고인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자살 사별자의 경우 이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덧붙여 고 박사는 “애도 상담을 통해서 자살 사별자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나는 결코 그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혹은 단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애도 과정을 언어화하며 이야기를 만들다

고 박사는 다음과 같이 애도 과정을 설명했다. “죽음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되짚어 생각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사별자 스스로 고인의 사망에 대한 죽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이야기는 사별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고인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고인과 사별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다”라며 “그래야 평생을 고인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그 엔딩에 몸이 묶여 허우적대지 않고 고인의 삶 전체를 기억하고 상실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사별자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애도 과정을 ‘기록(글쓰기)’하는 것이다. 왜 기록이 중요할까? 고 박사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죽음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글쓰기가 유용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사별자가 느끼는 애도 반응을 있는 그대로 언어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치료에 좀 더 도움이 되는 건 주제별 글쓰기다.

하지만 고 박사는 “글쓰기의 끝에는 반드시 누군가와 연결되어 타인과 함께 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당부했다. 글쓰기는 홀로 자신의 애도 과정을 떠나는 일이다. 고 박사는 “그 길에서 꼭 만나야 할 것은 나 말고 그 사람의 죽음을 함께 기억해 줄 사람”이라면서 “타인에게 나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순간 그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여섯 밤의 애도』에선 자살보도 권고기준도 언급된다. 국내 언론에 문제는 없을까? 고 박사는 “언론의 자살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는 ‘베르테르 효과’를 통해 일반인들의 자살률을 증가시킬 수 있다”라며 “반면, 자살에 대한 언론보도를 줄이거나 신중한 보도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살률이 낮아지는 ‘파파게노 효과’를 만들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국내외 선행 연구로 확인된 사실이다. 국내엔 ‘자살보도 권고기준’이 마련돼 과거보다 상황은 나아졌다.

하지만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이 나타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등에서 모니터링으로 주의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어, 고 박사는 우리 모두가 ‘자살보도 권고기준’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고선규 박사는 청년 자살이 늘어나고 있기에 대학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정신건강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고선규

 

 

자살보도, 베르테르 효과 대 파파게노 효과

그렇다면 최근 자살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고 박사는 “자살 연구는 주로 자살 예방적인 측면에서 많이 수행되고 있다”라며 “연구자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우울한 사람들 중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뇌과학 연구 패러다임 등 다양한 실험 패러다임이 적용된다. 고 박사는 “이외에도 빅데이터 분석과 머신러닝 방법을 이용해 SNS에 남긴 글을 살펴봄으로써 정서적 뉘앙스 변화를 탐지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라고 알려줬다. 자살 위험성을 사전에 탐지해 예방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고 박사는 “자살 사별자들 역시 자살 고위험군이기에 사후개입과 대응에 대한 연구도 늘어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자살 예방과 애도 상담 등 대학·교수 사회에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 박사는 “대학에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신건강 통합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라며 “청년 자살이 늘어나는 만큼 앞으로 대학교의 역할도 중요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고 박사는 “앞으로 대학평가에 있어 연구역량이나 학생 취업률 만큼 학생 정신건강에 기울인 대학의 노력에 대해서도 큰 비중으로 평가할 수 있기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심리부검면담(Psychological autopsy)’에서 ‘부검’이란 표현이 어렵다. 굳이 부검이라고 표현을 해야 하나.
심리부검이란 용어는 미국 LA 자살예방센터장이었던 임상심리학자 슈나이드만이 처음 만든 용어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학적 부검에 대비 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보건복지부에서 자살사망원인 분석을 위해 심리부검사업을 시작했을 때 ‘심리부검’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심리부검 면담에 참여할 자살유족들을 모집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정말 많았고 그 이유를 ‘심리부검’이라는 용어가 주는 무거움 때문이 아닐까하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죠. 정신건강 영역 실무자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용어를 공모하기도 했고요. 일단 적당한 후보가 없었고 전문가들의 논의 끝에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적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신질환 중 하나인 Schizophrenia를 우리나라에서는 정신분열병으로 쓰다가 2011년 ‘조현병’으로 바꿨습니다. 정신분열병이라는 용어가 해당 환자에 대한 낙인과 편견을 조장 한다는 당사자와 가족들의 의견이 용어를 바꾸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연구와 토론을 거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리부검이라는 용어가 누군가에게 불쾌감과 혐오, 낙인과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된다면 추후 변경할 여지는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학술적으로 공인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이야기(원인)는 애도 과정에서 정말 중요한가. 자살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인가? 없는 경우가 더 많은 건 아닌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별자들은 정확히 알기가 어려울 듯하다. 나와 타인의 관계처럼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애도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고인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이죠. 자살 사별자의 경우 이 첫 번째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자살이 아닌 사별과는 달리 자살로 누군가를 잃은 분들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애도 상담을 통해서 자살 사별자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나는 결코 그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혹은 단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날로부터 시작해서 사망 한 달, 3개월, 일년 등 고인이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 죽음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되짚어 생각하고 언어화 하는 과정에서 사별자 스스로 고인의 사망에 대한 사별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고인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고인과 사별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평생을 고인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그 엔딩에 몸이 묶여 허우적대지 않고 고인의 삶 전체를 기억하고 상실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사별자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애도과정을 ‘기록(글쓰기)’하는 건 어떤 측면에서 중요 혹은 필요한 것인가.
그 사람이 죽었다는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죽음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글쓰기가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별자 곁에 아무리 지지적이고 세심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사별자가 느끼는 매 순간의 생각과 감정들에 모두 공감하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사별자가 느끼는 애도 반응을 있는 그대로 언어화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좀 더 치료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효과성이 검증된 애도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제시하는 주제별로 글쓰기를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의 끝에는 반드시 누군가와 연결되어 타인과 함께 애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글쓰기가 홀로 자신의 애도 여정을 떠나는 것이라면 그 길에서 꼭 만나야 할 것은 나 말고 그 사람의 죽음을 함께 기억해 줄 사람입니다. 타인에게 나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순간 그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일,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애도는 회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발견의 과정”라고 적었다. 공감이 됩니다만, 사별자들에겐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는 것 같다.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한 것인가. 
말씀하시는 ‘완전한 회복’이 상실 이전의 ‘나’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르트(R. Barthes)의 말처럼 애도는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르트는 이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주체의 탄생을 “vita nova”라고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vita nova는 “사랑하는 사람 에 대한 애도가 불러일으키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지우지 않고 내가 이어가는 삶에서 그 사람을 기억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애도 상담에서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하고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이 확산되었다. 자살이나 자살상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까.
펜데믹 상황으로 인해 비대면 상담을 진행하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대면상담을 원하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개인 상담 클리닉을 운영하는 다른 동료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펜데믹 초반에는 비대면 전환이 늘었고 내담자의 수도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지만 다시 이전으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설 상담센터의 예이고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등  공공의 정신건강영역 최일선의 있는 분들의 상황은 다릅니다. 언론에도 보도 되었듯 펜데믹 상황에서  자살위기상담 전화가 급증하고 있고 따라서 실무자들의 소진이 심한 상태입니다. 

△현재 자살보도 권고기준은 문제가 없는가.
언론의 자살에 대한 선정적인 보도는 ‘베르테르 효과’를 통해 일반인들의 자살률을 증가시킬 수있고 반면에 자살에 대한 언론보도를 줄이거나 신중한 보도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살률이 낮아지는 ‘파파게노 효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국내외 선행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자살 보도 이후 일반인 자살률이 증가하게 되는데, 자살이 고위험군에서 발생하게 유도하는 것 뿐 아니라 보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대상자에게도 자살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국내 ‘자살보도권고기준’ 이 마련된 이후 레거시 미디어에서는 과거보다 보도의 행태 등이 많이 개선되었으며, 언론 현장에서도 자살예방에 있어 언론의 책임의식에 대해 공감하고 동참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유투브를 비롯한 새로운 플렛폼에서 방송되는 자살 관련 컨텐츠에는 이러한 기준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에서는 이런 컨텐츠에 대해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면서 주의와 경고를 주고 있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 전체가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준수하는 것이 어떤 측면에서 중요한지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책에서 “나는 그저 그 길을 걷는 사별자 곁의 동반자일 뿐이다.”(175쪽)이라고 적었다.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객관적으로 거리 두기가 어려우실 것 같다. 동화된 적도 있을 것 같다.
내담자의 이야기에 동화됐다기보다는 다양한 자살사망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살’에 대한 예민성이 높습니다.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누군가를 볼 때 혹시 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하고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일상에서 자살이라는 죽음이 얼마나 갑작스럽고 허망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 마음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자살의 연구는 최근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자살 연구는 주로 자살 예방적인 측면에서 많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최신 기술을 활용해서 자살 위험성이 높은 사람들을 선별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정신건강 이슈 특히 우울증과 자살과의 관계는 수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우울증 환자들이 모두 다 자살을 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연구자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우울한 사람들 중 자살에 이르는 사람들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인데 이 때 뇌과학 연구 패러다임, 다양한 실험 패러다임을 적용합니다. 그 밖에 빅데이터 분석과 머신러닝 방법을 이용하여 트위터 등 SNS 에 남긴 글을 내용과 정서적 뉘앙스 변화를 통해 자살 위험성을 탐지하는 연구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지만 자살 이라는 행위에 미치는 것은 이러한 개인 내적인 요인만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 문화, 경제적측면에서도 자살을 설명하는 연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최근 늘어 나고 있는 청년세대, 특히 2030 여성 자살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정신건강측면으로만은 통계치의 추이를 설명하기 어렵거든요. 결국 자살 연구는 그야말로 다학제적인 접근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자살 이후 남겨진 사람을 만나다보니 사후개입(postvention) 연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자살 사별자들이 자살의 고위험군이라는 것은 이미 선행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만 사후개입의 측면에서의 연구는 매우 부족합니다. 자살예방 게이트키퍼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처럼 자살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사후대응의 중요성에 대한 연구와 관심도 늘어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대학·교수 사회에 하고 싶으신 말씀은 무엇인가.
각 대학에서 학생 정신건강에 대한 심리적 개입이나 학생 자살 이후 사후 대응에 대해 개인 정신건강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 대학에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신건강 통합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대학교 학생상담센터에서 상당기간 상담교수로 근무한 적이 있고 학교 내 자살 발생에 대해 사후 대응을 해 본 경험도 있습니다. 대부분 대학교는 그런 일이 우리 학교에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정도이지 정말 진지하게 구성원의 자살, 그 자살로 인해 영향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청년 자살이 늘어나는 만큼 앞으로 대학교의 역할도 중요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대학평가에 있어 연구역량이나 학생 취업률 만큼 학생 정신건강에 기울인 대학의 노력에 대해서도 큰 비중으로 평가할 수 있기 바랍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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