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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리기, 아직은 희망 있습니다”
“대학살리기, 아직은 희망 있습니다”
  • 교수신문
  • 승인 2001.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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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5 00:00:00
안상헌 충북대·철학과

최근 정부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정책과 사학의 교권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대학들이 얼마나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또한 ‘국립대학 발전계획’과 대학 자체 ‘발전계획’ 제출과 관련해 국립대에서 분출하고 있는 반대와 불신의 소용돌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소상하게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에 관련된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교수단체에서 수 차례에 걸쳐 다각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공개하고 또 교육부장관을 만나 전달했다 하니 긴 말씀은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사태가 이렇듯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음에도 대학 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국립대 총장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 많은 교수들은 분노와 배신감을 넘어서 참담함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대학 민주화와 자율화의 첫 산물인 직선제 총장이 군부독재 시절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자청했던 임명제 총장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비탄의 목소리까지 들립니다. 솔직히 지난 수년간의 교육개혁정책에 대한 대학들의 대응 방식을 보면서 이런 목소리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당근과 채찍’으로 일관하는 교육정책 하에서 대학의 부족한 재정을 조금이나마 충당해 보겠다는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학들이 제출한 ‘발전계획’을 보면서, 직선 총장들의 손에서, 그것도 한 때 전국국공립대학교교수협의회 회장단의 일원으로서, ‘대학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던 총장들의 손에서 대학의 권위와 자존심을 송두리째 내팽개치는 이런 한심한 작품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90년대에 걸쳐 여러분과 함께 국교협에서 일한 적이 있는 저로서는 참으로 황당하고 민망한 심정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총장님들께서도 대학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위해, 교육관계법령의 개정을 위해, 밤샘토론을 하고, 국회와 교육부를 뛰어다니던 지난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 오랜 노력 끝에 98년에는 대학의 자율과 민주적 운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교육법 117조 ‘대학평의원회’ 조항이 폐지되고, 교수회의 학칙기구화를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아직 대부분의 국립대에서는 교수회의 학칙기구화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한 대학은 재정지원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서슬이 퍼런 군부독재 치하가 아니라 ‘국민의 정부’를 자칭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와 교육관료들에 의한 대학 통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심해지고 악랄해졌습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국가안보’의 미명하에 대학의 숨통을 죄었습니다만, 지금은 ‘대학개혁과 구조조정’이라는 명분 하에 대학의 숨통을 죄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국가가 대학에 재정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대학을 통제하고 간섭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대학은 여태껏 과장급 교육관료의 탁상공론과 통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학에 대한 외부의 간섭과 통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헌법에 명시된 대학자치 이념과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운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한, 대학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개혁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생겨나지 않는 한, 우리 대학의 진정한 개혁과 발전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지난 수 십 년간 교육부 주도하에 추진된 수많은 대학정책들의 실패를 통해서도 명백히 증명됐습니다. 그리고 대학의 실정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교수 집단이 개혁의 중심에서 밀려나 소외되면, 아무리 그럴듯한 정책도 실패하고 만다는 것은 지난 대학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율적 발전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획일적 교육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면 될수록, 대학은 결과야 어찌 되든 온갖 잔꾀를 부려서라도 정부가 주는 돈이나 챙기고 보자는 식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며, 교수는 교수대로 본연의 소명을 방기한 채 눈치나 보고 실속 없는 논문을 써내면서 업적물량이나 채우는 위선과 자괴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개혁을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개혁이 겉돌고,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폐기되는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아직 한 번도 지금까지 추진했던 대학정책들의 실패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거나 평가해 본 적이 없으며, 교육관료 중 누구도 실패한 대학정책에 대해 책임을 진 적도 없습니다.

이제 대학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모든 대학인이 뜻을 모아 헌법에 명시된 ‘대학자치’를 선언하고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총장들께서 전면에 나서 이 길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총장께서는 ‘진정한 대학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서는 대학의 자율화와 민주화가 최우선적 선결과제’라는 지난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먼저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평가용 보고서 작성과 제출을 단호히 거부하십시오. 대학 통제와 간섭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의 폐지와 교육부의 축소와 혁파를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대학 자치의 토대 위에서 학과, 학부, 단대, 대학원, 연구소 각 부문에 걸쳐 전체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 하에 위기에 처한 ‘대학 살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서십시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時中의 지혜를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대학은 조만간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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