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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
  • 김재호
  • 승인 2021.12.10 15: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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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체험적 현실의 진실만을 추구하라!”
삶의 진실은 메마른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리니
생생한 감각적 체험을 통해 존재의 진실을 체득하는 법을 배우라!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는 위대한 그림들에 대한 철학적 해설을 읽어 나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도록 할 목적으로 기획된 책이다. 위대한 철학이 대개 그렇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은 결코 지적인 추론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체험적 현실을 가슴으로 생생하게 느껴 보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을 위대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해 보는 것은 매우 탁월하고 유용한 방식이다. 철학도 예술도 실은 체험적 현실을 표현하는 상이한 방식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는 머리로 헤아리려 할 때는 어렵기만 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생생하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그림을 만나다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이름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그의 이름에서 그의 철학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이는 그의 이름에서 그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철학자를 떠올릴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실망스러웠던 그의 행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그의 행보, 관계 그리고 철학 모두가 그라는 사람을 이룬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람들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하이데거가 20세기 철학에 남긴 그 발자취는 그 누구보다 거대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누구보다 거대한 20세기 최대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주저는 누가 뭐라 해도 『존재와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려 시도한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용어라는 장벽과 난해한 철학이라는 철벽에 막혀 좌절하기가 십상이다. 저자는 철학도조차도 이 책을 어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하이데거의 철학은 아직 온전히 이해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20세기 최대 철학자의 철학을 비껴가야만 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의 철학을 마주해야 한단 말일까?

잠깐 다른 얘기로 돌아서 보자. 그림은 어떠한가? 사람들 대부분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의 미학적 의의는 잘 알지 못하기 마련이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혹은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며, 입체주의라든지 인상주의라든지 하는 개념들을 이해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 적용된 그림인지, 그래서 그것이 그 그림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이바지하고 있는지 계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그 그림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압도되면서, 그 그림이 안겨 주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그저 느껴 본 적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는 예술을 보며, 그것을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감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예술가들 또한 아마도 자신의 작품을 이리저리 해체하여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느끼기를 더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마주하는 적합한 방식은 어쩌면 미학적 분석이 아닌 감각적 감상일 수 있는 것이다. 꼭 예술이 아니더라도 이처럼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그저 느끼려고 할 때는 무언가 깨달음을 줄 때가 있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인 만큼 감성의 동물이기도 한 탓이다. 그런데 실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메마른 지성의 한계를 넘어 감각하라

우리 앞에 붉은 꽃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실로 ‘붉은’ 꽃일까? 예컨대 그것은 색맹이거나 색약인 사람, 나아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붉은 꽃일까? 더 나아가 내가 보고 있는 붉음은, 과연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보는 붉음과 같은 것일까? 이런 것들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 봐도 소용없는 짓이다. 과학은 당신에게 꽃이 붉게 ‘보이는’ 까닭은 빛의 흡수와 반사에 따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또 그 꽃에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빛이 반사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성적으로 우리는 그 꽃이 붉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 꽃을 보며 그 꽃이 붉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꽃의 향기를 맡으며, 그 꽃이 향기롭다는 사실을 ‘안다.’ 꽃의 가시가 날카롭다든지, 꽃잎이 부드럽다는 사실 역시도 우리는 그저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이성적 비판 작용을 통한 인식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감각으로써 그 꽃이 어떻다는 것을 알 뿐이다. 당연히 이것은 꽃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갑자기 왜 꽃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은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꽃에 관한 이야기를 횡설수설하더니, 이제는 그것이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꽃이 아니더라도, 설령 구름이나 바다와 같은 것일지라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앞선 꽃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는 모두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메마른 지성으로 이해하려 했을 때는 잡히지 않던 것이 감각으로써 느끼고자 할 때는 우리 곁에 다가온다는 체험적 현실이다. 현실이라는 말을 진실로 바꾸어 보아도 여기서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우리의 메마른 지성은 일단 제쳐 두고, 우리에게 체험적 현실을 알려 주었던 감각을 한번 이용해 보자.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색다른 방법을 이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어쩌면 아무런 기대도 없이 했던 시도가 우리에게 돌파구를 선물할지 모른다. 안 그래도 어려운 하이데거의 철학을 그림을 통해서 이해하라니, 별 믿음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차피 이해하기 어려웠던 철학이니, 밑져야 본전 아닌가. 적어도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새로운 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생생히 체험함으로써만 존재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체험적 현실이고 감각이란 말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의 근원적 자리는 ‘어떤 것을 순연히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받아들임’, 즉 아이스테시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고 인지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가 인지한 그대로라는 것을 로고스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떻게 인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어떻게 인지했다는, 즉 우리에게 그 존재가 어떻게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간단히 생각해 보자. 지금 당신이 만난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는 강렬한 색으로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그 색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까? 당신이 받아들인 그 색이 절대적인 참이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 색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즉 당신에게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색은 그 강렬한 색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당신의 체험적 현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신의 체험적 현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상대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드러난 현상만이 존재의 전부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현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존재는 동시에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진실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생히 체험함으로써 그 존재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현실(탈은폐)과 그를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그 내면에 감추어진 존재의 진실이 존재함(은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이데거의 철학을 넘어 삶과 존재의 근원적 현상을 향해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의 지도도 없이 삶과 존재의 근원적 현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조금 도움을 받아 보자, 이 책 『그림으로 보는 하이데거』는 그림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림이 우리 “자신의 삶에 불러일으킨 체험적 현실을 음미하고” 그를 통해 “감각이란 감각하는 자의 존재에서 일어나는 변화로서만 가능하다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존재론적 진실”과 만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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