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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가을호 리뷰: 메타비평의 범람
문예지 가을호 리뷰: 메타비평의 범람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9.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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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인을 주목한다"

문예지 가을호에 메타비평이 넘쳐났다. ‘오늘의 문예비평’에서는 문학평론가 홍기돈 씨가 ‘최원식 평론에 관한 몇가지 단상’을 통해 그에 대한 평가를 시도해 주목을 끈다. 그런가하면 문학평론가 최강민 씨가 젊은 여성비평가인 서영인 씨의 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창비 刊)에 대해 재미있는 서평을 실었다.

‘문학동네’ 가을호의 특집 ‘지금-여기 비평의 현주소’는 손정수, 김형중, 심진경 등의 젊은 비평가들의 비평세계를 다루고 있다. 손정수와 김형중의 최근 평론집에 대해서는 ‘문학·판’에서도 다뤄져, 이들이 동료들 사이에서 꽤 읽히는 비평가들임을 짐작케 한다. ‘문학·판’에서는 정과리의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刊)도 다루어졌다. 최근 나온 비평집들에 대한 나름의 점검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문학동네’에서 손정수·김형중·심진경의 비평을 다룬 김미정 씨의 글이야말로 우리 비평의 우울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 씨의 글은 한마디로 개념들을 어설프게 연결시킨 솜씨없는 모자이크에 불과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으며 비평에 대한 비평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메타비평은 따라읽기가 아니다. 김 씨의 글은 비평가들이 A라고 한 것을 그대로 A라고 받아들이는 비판적 감수성의 부재를 보여준다. ‘문학·판’에 실린 김근호 씨의 글 또한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학의 자율성은 근본적으로 타자들과의 긴장관계를 통해 구성된다”라는 말을 보자. 여기 어떤 긴장이 존재하는가. 어떤 인식이 놓여있는가. 이런 진술은 개성적 진술이 아니라, 남이 한 말을 재진술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 말인지, 남의 말인지를 구별할 능력도 없어 보이는 글이 ‘비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현실이 황당하다.

이에 비해 ‘오늘의 문예비평’의 메타비평은 싱싱하게 살아있다. 먼저 최원식을 평가한 홍기돈은 어떤 메시지를 던졌나. 그는 최원식 비평의 첫인상을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역사적 맥락’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명료화하는 능력으로 든다. 해박한 지식이 현학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지반 위에서 보다 거시적인 지향을 가늠하게 해준다고 평가한다.

또 하나는 성찰의 긴장이다. 최원식의 비평을 쉽게 읽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학문과 비평의 종합에 대한 자의식, 학문이라는 것이 體得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꾸준히 드러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

홍 씨는 그러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會通’을 강조한 최원식 비평의 논리가 문학의 내적 논리인지, 아니면 상업적 계산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조화시킨 문인으로 고작 김수영 정도를 거론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 홍 씨는 여기서 평론가 최원식과 ‘창작과비평’의 주간 최원식의 균열을 읽어낸다. 그것은 “자본의 시대와 제휴한 擬모더니즘만 횡행”하는 현실에 그 또한 한발 걸치고 암중모색하고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홍 씨가 관찰하듯 최원식의 비평이 학문과 비평의 종합,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이라는 선언에서 좀처럼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솔직담백한 비평세계를 지닌 젊은 비평가의 등장은 세대간의 긴장을 연출한다. 최강민 씨는 서영인 씨의 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에서 비평가의 자세를 먼저 주목한다. 즉, 민족문학이나 문학주의 어느 일방에 포박된 편집증적 애정을 보내는 여타 평론가들과 달리 그는 “작품이나 작가가 괜찮다면 털썩 주저앉아 귀담아 듣는 소탈한 비평적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 이런 소탈함은 사실 강인한 주체성의 다른 모습이기 쉽다. 최 씨가 간파하는 서영인의 비평적 특징은 평이한 언어, 서구이론의 배제, 대상텍스트가 변할 때마다 문체에 변화를 줌, 작가론을 쓸 때 다른 작가를 언급하지 않고 해당 작가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방식 등이다. 그리고 비평가들에 대한 서 씨의 날카로운 관찰도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데, 가령 문학제도와 관행에 대해 문제제기한 이명원에 대해 중견평론가인 임규찬과 윤지관이 대응하는 방식을 비판한 대목이 그렇다. “그들의 글은 문제제기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그 문제제기의 핵심을 덮어버리고 다른 문제를 끌어와서 처음부터 다시 논함으로써 문제제기자들의 담론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은 정확하고 신랄하다.

‘가을’ 문예지에 메타비평이 넘쳐나지만 그것이 수확한 것은 중견평론가인 최원식 비평에 대한 후배평론가의 솔직담백한 조명, 그리고 신예평론가 서영인 씨의 존재 정도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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