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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대 이강선 교수, 한영번역서 ‘아리랑’ 출간
호남대 이강선 교수, 한영번역서 ‘아리랑’ 출간
  • 최승우
  • 승인 2021.12.06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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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후원, 공동저자들과 아리랑의 역사와 변천 과정 묘사
이강선 교수 “아리랑, 한국인 정서를 잇는 도구로 쓰임 깨달아”

호남대학교(총장 박상철) 교양학부 이강선 교수가 한영번역서 ‘아리랑: 대한민국의 서정적인 민요(ARIRANG: LYRICAL FOLKSONG IN THE REPUBLIC OF KOREA)’를 출간했다. 

한국 문화재청이 후원하는 K-Heritage 총서의 일부인 아리랑은 아리랑의 역사와 변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3명의 한국인 저자(김영운, 김혜정, 유명희)는 아리랑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 아리랑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계기를 기술하고 전통 아리랑뿐 아니라 다양하게 변형된 현대의 아리랑에 관해 기술했다. 

원래 아리랑은 강원도에서 탄생했으며 모를 심으면서 고된 일을 흥겹고 쉽게 하기 위해 부른 노동요였던 것이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축시 강원도에서 목재를 날라온 일꾼들에 의해 서울로 들어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문헌에는 그 전에 이미 아리랑이 존재한다고 수록되어 있지만, 아리랑의 탄생과 연관된 설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당시 부자들이 궁 재건을 위한 기부금 강권을 듣기 싫어 차라리 귀가 멀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아이롱’을 반복했고, 궁 재건축에 동원되었던 평민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노동해야 하는 것이 싫어 ‘아리랑’ 혹은 ‘아난리’라고 했는데 이 어휘들이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랑이 전국민의 민요가 된 것은 일제 치하에서 영화감독 나원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이 영화의 주제가로 만든 아리랑이 본래의 아리랑을 밀어내고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해외로 간 유학생들이 부른 아리랑이 음반으로 녹음이 되어(1896년) 지금까지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일제 치하에서 강제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이민자들이 설움과 함께 아리랑을 간직하고 새로 자리 잡은 나라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아리랑을 불렀으며 독립군과 광복군들이 심지어는 비밀 암호로 사용했다는 기술에서는 뭉클하다. 이제는 이민 3세대가 되었지만 동포들은 여전히 고국에 대한 상징으로 아리랑을 간직하고 있다는 기술에 이르면 현대 한국인들이 그처럼 아리랑을 아끼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호남대 이강선교수
호남대 이강선 교수

물론 그렇다. 2012년 아리랑은 무형문화재로서 북한의 아리랑과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으며 현재 아리랑은 약 60여종, 3,600여곡에 이른다. 아리랑은 그 특성상 누구라도 즉석에서 새로운 가사를 지어낼 수 있으므로 그런 활동을 통해 지역적·역사적·장르적 변주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화적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강선 교수는 “번역하는 동안 아리랑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흐뭇하다”면서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소리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주변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학생들의 ‘소리’가 더 와닿았다. 한편으로 시험을 보고 나쁜 성적을 받아든 학생이 만든 아리랑의 변주 가사를 읽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그만큼 아리랑이 우리 실생활에 한국인다움을 일깨워주는 한편 한국인의 정서를 이어가는 도구로 활동하고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면서 “아리랑에는 한국인의 서정적 민요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수식어답게 이 서적이 한국인의 감정을 더욱 잘 전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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