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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세계를 지탱하는 것들
가상세계를 지탱하는 것들
  • 유만선
  • 승인 2021.12.09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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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선의 ‘공학자가 본 세상’ ⑨

가상세계를 떠받치는 실제세계는 무엇인가
전기에너지 중 약 13%는 IT기기에 쓰였다

1980년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일공부를 밀려 어머니께 꾸중을 듣고, 집을 뛰쳐나와 찾아 간 곳은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가끔은 무서운 형들이 있었던 동네 오락실이었다. 성인이 된 1990년대, 대학에 들어가 친구들과 치맥을 하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것으로 모임을 마치기도 했다.

구글 데이터센터로 들어가는 전기선은 미국 오레곤에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오락실과 PC방, 모습은 크게 다를지 모르겠지만 이 두 곳을 찾아간 내가 진정 다다르고자 했던 곳은 갑갑하고 건조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가상세계’였다. 게임기 속에 구현된 조그만 세계에서 PC끼리 연결된 거대한 인터넷 세상으로 게임 속 가상공간이 커져갔듯, 가상세계 속 인간의 활동은 계속 늘어났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 따르면 2020년 생성된 디지털 정보량은 44제타바이트(Zeta Byte)로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서고를 자랑하는 미국 의회도서관 6천만 개의 자료규모에 해당한다. 인간의 활동이 만들어 낸 가상세계의 정보량을 알 수 있게 하는 숫자이다. 참고로 1제타바이트는 10의 21제곱바이트이다. 

가장 중요한 컴퓨터와 디스플레이

‘가상세계’와 ‘정보’를 다루는 IT기업들이 크게 성장해 있는 현재, 또 하나 살펴봐야 하는 것이 가상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현실 속 물건들이다.

첫째로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여 가상세계를 구현하고 또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컴퓨터’이다. 컴퓨터는 1939년 독일의 암호기계인 ‘에니그마(Enigma)’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천재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앨런 튜링(1912∼1954)이 만들어낸 자동계산기계 ‘봄브(Bombe)’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컴퓨터는 더 복잡한 계산을 위해 구멍이 뚫린 테이프나 카드의 형태로 수치정보를 입력받는 큰 몸집의 계산장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중앙처리장치, 입력장치, 출력장치 그리고 별도의 메모리부 등으로 컴퓨터 구조를 구분하게 된 것은 1945년 또 한명의 천재 수학자 존 폰 노이만(1903∼1957)에 의해서였다. 

한편, 초기 컴퓨터는 주요부품이 큼직한 진공관이었기 때문에 큰 공간과 전기에너지를 요구하였다. 1947년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1910∼1989) 등에 의해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 얼마 뒤에 로버트 노이스(1927∼1990) 등에 의해 칩 형태의 집적회로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컴퓨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놓이거나 우리가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속에 자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컴퓨터에 의해 구축된 가상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으로서 ‘디스플레이’ 또한 가상세계에 중요한 물건이다. 가상의 정보를 눈으로 보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눈을 자극하는 ‘빛’을 인간이 마음껏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었고, 1897년 칼 페르디난트 브라운(1850∼1918)이 자기력으로 조종할 수 있는 음극선관을 개발함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음극선관은 전기신호를 눈으로 보여주는 오실로스코프 장치나 전쟁 중 레이더 화면을 만드는 데에 쓰였으나 이후 텔레비전 화면으로 쓰여 산업적으로 그 가치가 커진다. 하지만, ‘브라운관’은 액정화면이라고 불린 LCD(Liquid Crystal Display)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LCD 또한 현재 빛을 내뿜는 전기소자들을 집적하여 만들어 낸 LED(Light Emitting Diode) 화면으로 교체되었다. 특히, LED 디스플레이는 1993년 나카무라 슈지(1954∼) 박사의 블루 LED 개발에 힘입어 산업화에 성공하였고, 그는 이러한 공로로 2014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마지막으로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를 조종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도구들도 중요하다. 컴퓨터로 보자면 마우스나 키보드, 게임기로 보자면 게임조종기, 스마트폰에서는 터치스크린이나 각종 버튼 등이 중요한 가상세계 조종도구들이다. 

 

전기 없으면 가상세계도 없다

엄청난 규모로 커져버린 ‘가상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장치들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치들이 작동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는 무엇일까? 고급에너지에 속하는 ‘전기’이다. 실제 2010년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정에서 사용되는 전기에너지 중 약 13%가 IT전자기기에 소모되었는데 에어컨이나 냉장고, 난방기와 같이 전력소모가 큰 전기장치들을 고려했을 때 적지 않은 전기가 가정에 있는 가상세계 도구들에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구상의 데이터센터들이 연간 소비하는 전기는 연간 약 9백억 킬로와트시(kWh)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대략 30개가 넘는 석탄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모두 쏟아 부어야 하는 양이다.

이처럼 엄청난 규모로 커져가는 ‘가상세계’를 따라 그 속의 정보를 담는 실제세계의 도구들도 계속해서 발달되고, 필요한 에너지양은 점차 커지고 있다. 가상세계와 그 세계를 떠받치는 실제세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시기이다.

 

 

 

유만선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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