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30 00:25 (토)
[한민의 문화등반 25]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방법
[한민의 문화등반 25] 인간의 한계를 넘는 방법
  • 한민
  • 승인 2021.12.09 0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민의 문화등반 25

 

한민 문화심리학자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다. 생물,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센 사람도 기중기를 이길 수 없으며 아무리 빠른 사람도 자동차보다 느리다. 말랑말랑한 피부는 맹수의 발톱을 당해낼 수 없고 이빨은 짐승의 가죽을 뚫을 수 없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고 집단을 이루고 지금 같은 문명을 구축한 것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한계 중 고래로 사람들을 가장 좌절하게 만든 것이 바로 수명이다. 사람은 오래 살아야 100살을 넘지 못한다. 가끔 넘는 분들이 계시지만 평균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예외로 하자. 살면서 아무리 커다란 부를 모으고 위대한 업적을 남겨도 결국에는 모두 두고 가야 한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이룬 것이 많을수록 죽음은 진정 피하고 싶은 종말일 터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죽지 않는 법을 연구했다. 진시황으로부터 수많은 권력자들은 불사의 약을 찾았고, 어떤 이는 수행으로, 어떤 이는 의술과 과학으로 불로불사의 문을 두드렸다. 물론 죽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의학과 과학이 발전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노화와 죽음은 현대 의학의 마지막(?) 과제다. 노화를 늦추고 죽음을 미루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 몇몇은 실제로 임상 실험에서 효과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미래는 아닐 것이다. 이미 일부 영화에서는 상류층의 전유물이 된 불로불사의 기술과 비참하게 죽어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비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살아있는 순간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이야말로 현 시점의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겐 ‘오늘만 산다~’라는 식으로 잘못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아무리 충실한 삶을 살았어도 죽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애써 잊으려 했던 허무함을 순간순간 끌어올린다. 죽지만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심리학자 매슬로는 초월의 욕구를 이야기한다. 초월욕구란 자기실현의 욕구 중 하나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한다. 물론 실제로 영원히 산다는 뜻은 아니다. 초월욕구란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욕구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빨리 달리기 위해 자동차를 발명하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기 위해 기중기를 발명하는 것, 노화와 질병을 막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역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노력들의 산물이다. 자손을 낳아서 나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초월의 욕구일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 능력의 극복이나 수명의 연장, 유전자의 전달과는 별개로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영속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부와 명예, 아내와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안온한, 그러나 몇 대(代)가 지나면 잊혀질 삶보다는 영원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죽음을 선택했다. 베토벤은 200년 전에 죽었지만 우리는 동네 쓰레기차의 후진 경보음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의 어떤 선택, 누군가가 남긴 정신과 자취는 그의 죽음 후에도 길이 남아 그의 존재를 되새기게 한다. 이것이 매슬로가 이야기하는 초월이다. 

물론 우리는 아킬레우스가 아니다. 누구나 모차르트나 베토벤, 아인슈타인, 마더 테레사가 될 수는 없다. 게다가 당장 끼니 걱정에 오늘 잘 곳조차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초월을 꿈꿀 수 있을까. 

그러나 초월은 그렇게 위대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 꼭 이름을 기억해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이 이 세상에 다녀간 수많은 이들 덕에 존재할 수 있다. 내가 그들을 떠올리고 기린다면 그들 역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저 내가 해 왔던 일들을 오늘도 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끝마치지 못한 일은 누군가 또 이어받아 할 터이다. 죽으면 끝이니 내 사는 동안 끝을 봐야 한다는 집착은 여러모로 도움될 데가 없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