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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는가: ③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빌렘 플루서
당신은 아는가: ③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빌렘 플루서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5.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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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루한을 넘어서

빌렘 플루서(1920~1991)는 그가 남겼던 학문적인 자취에 비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매체이론가다. 마셜 맥루한과 더불어 매체이론가로서 양대산맥을 이룬다 할 수 있지만, 브라질 상파울로대 교수였던 그의 저서들이 국내에 소개된 건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다. 플루서는 학문적 기반은 후설의 현상학에 두고 있으면서 세계를 ‘매체’로 바라봐 이에 대한 철학적 연구들을 진행했으며, 노르베르트 볼츠와 같은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상가이다.

최초의 이론가들은 ‘주술’이라는 형상적 사유를 전유했었다. 라스코 사람들은 그들의 사유를 동굴벽면 그림으로 옮겼으며, 빌렌도르프 주민들은 그들의 사유를 비너스 상 조각으로 보여줬는데, 이것은 3차원의 형상적 사유였다. 그러나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은 세계를 ‘언어’로, 그리고 ‘숫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인간은 선형적, 과정적, 논리적인 방식과 형식적, 계산적, 분석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플루서는 이런 선형의 ‘역사주의적’ 세계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제 카메라, 텔레비전, 컴퓨터 등의 ‘기구(혹은 장치 apparatus)’를 접하는 인간들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현재의 선은 점들로 산산조각 날 찰나에 있”다. 컴퓨터가 작동하는 세계는 0과 1의 픽셀들로 조합된 점의 세계다. 그리고 컴퓨터를 다루는 인간들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에 요청되는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는 ‘피상성 예찬’(김성재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刊)에서 “아직도 맥락 속에서, 선 속에서, ‘역사’ 속에서 수영하고 있는” 인간들을 비판한다. 플루서는 ‘기구’가 작동하는 ‘가상의 현실’에 주목한다. “왜 우리는 가상을 불신하는가? 가상이 기만을 한다면 이 세상에 기만하지 않는 것도 있단 말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말이다.

플루서가 (대중)매체를 세계를 인식하는 틀로 봤다는 점에선 맥루한과 상통한다. 둘다 매체(기술)로 인해 변형되는 사회를 눈여겨 봤으며, 기술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재를 정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루서는 ‘기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기술(기구)는 “책략적”이기 때문이다. 곡예사의 공중제비술에 의해 인간은 기만당할 수 있다. 이를테면, 찍혀진 사진을 보면서 그것을 마치 ‘세계 그 자체’로 인식하듯이 말이다. 텔레비전도 대표적 속임수다. 그것은 이미 인간을 사물화시키며 허위적 담론을 폭로하는 기구로 전락했을 따름이다. 때문에 플루서는 맥루한의 이론을 ‘형이상학적’이며, ‘뜬구름잡기’로 여겼던 것이다.

‘기구’가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을 가능케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구를 작동시키는 것은 인간이다. 플루서는 기구프로그램에 대처하는 인간의 창의적 능력을 낙관한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세계에서 새로운 ‘주체’란 사진 혹은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그림의 홍수 가운데에서 그림을 생산하면서도 단호히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곡예사들이다. 인간은 기구에 의해 매몰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커뮤니케이션망을 통해 ‘대화적인’ 텔레마틱 사회로 나아감을 ‘그림의 혁명’(김현진 옮김)이란 책을 통해 그리고 있다.

‘기구’의 하나로서 그는 또한 사진기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사진은 기술적 영상으로, 장치를 통해서 세계의 표면을 빛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건 필연적으로 세계의 징후일 수밖에 없고 표면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는 마법의 그림이다. 이러한 영상은 문자와 다르다. 사진은 암호화된 세계를 보여준다. 카메라라는 기구는 문화의 한 부분이고, 문화를 조명하며, 문화를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윤종석 옮김)에서 사진기에 주목한 플루서는 20세기에 유일하게 ‘사진’이란 단어에 ‘철학’이란 말을 붙인 책을 쓴 이며, 사진적 행위와 실천을 인류에 대한 철학적 영역으로 끌어올린 공을 세웠다. 

카메라를 통해 바라봐지는 세계와 인간의 손가락 끝의 ‘총총걸음’을 통해 이뤄지는 컴퓨터화된 세계는 ‘희망적’이다. 손가락 끝의 움직임으로 컴퓨터는 상상을 창출한다. 즉 기구는 ‘세계-관조’에 봉사하게 된다. 플루서의 말처럼, 우리는 역사로부터 탈역사로 비약하기 위해 기구들을 우리의 사고, 감정, 행위의 모델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텍스트는 현상 뒤에서 ‘본질’이나 그럴 듯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류’에서 빠져나온 새로운 인식단계이다.

3차원의 세계에서 0차원의 세계로 왔던 인간은 이제 거꾸로 가고 있다. 컴퓨터의 픽셀들을 조합하며 동영상까지 만들어내는 4차원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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