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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24] 고구마 스틱의 추억
[한민의 문화등반 24] 고구마 스틱의 추억
  • 한민
  • 승인 2021.11.24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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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24

 

처음으로 고구마 스틱을 봤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쯤의 일이었다. 카바이트 불빛에 노랗게 빛나던 고구마 스틱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놓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구마 스틱을 사주지 않으셨다.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었던지 아니면 마침 돈이 없었을 것이다. 길거리의 먼지가 앉은 음식을 아이에게 먹이고 싶지 않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고 고구마 스틱은 곧 잊혀졌다. 아니 잊혀졌다고 생각했다. 스물다섯 살도 넘은 어느 날 전까지는. 그것도 친구가 말을 해서 알게 되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식을 사먹던 중이었다. 

“넌 왜 고구마 스틱만 먹어?” “내가?” 그 순간 어린 날의 영상이 눈앞을 스쳤다. 까맣게 어두운 밤. 노랗게 빛나던 카바이트 불빛 뒤에서 반짝거리던 고구마 스틱. 안다. 고구마 스틱은 빛나는 물건이 아니라는 거. 그런데 그날의 고구마 스틱은 빛이 났다. 그렇게 욕망은 한 아이의 마음속에 깊이 숨어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어느 날 동네 장터에서 고구마 스틱 한 자루를 사왔고 나는 그 후로 한 달 반쯤 시도 때도 없이 고구마 스틱을 먹어야 했다. 밥 먹고 나서, 간식으로, 일하다가, TV보다가…. 먹어야 했다고는 했지만 아주 기쁜 마음으로 먹었던 것 같다.

한 자루의 고구마 스틱이 사라진 뒤 어느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여느 때와 같이 고구마 스틱을 사려는데 불현듯 알 감자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마치 이전까지는 세상에 알 감자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새로운 간식의 세계에 눈을 떴고 이후 우리 가족의 여행은 온갖 간식으로 매우 풍성해졌다는 결말이다. 

이 이야기는 정신역동이론의 고착과 퇴행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실화다. 고착이란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붙잡혀 있다는 뜻이며 퇴행이란 그 욕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다. 어떤 욕구에 고착되면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물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따라서 고착된 욕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이유도 알 수 없이 고구마 스틱을 사먹는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온갖 이유를 붙여 가면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예로 든 내 사례에서처럼 고구마 스틱 한 자루로 해결될 수 있는 욕구는 아주 사소한 종류다. 20년 넘은 욕구를 해소하는데 2만 원 정도면 공짜나 다름없다. 더구나 내가 고구마 스틱을 먹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어떤 종류의 욕구는 매우 충족되기 어렵다. 충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욕구를 충족하는 일 자체가 다른 이들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려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좌절된 욕구는 쉽게 의식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힘들고 비참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이렇게 하찮고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선은 그 욕구가 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먼저다. 그래야 해결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는 욕구라면 충족 방법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욕구는 최대한 충족하되 그 형태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으로 바꾸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이 정도 노력은 해 줘야 한다.

욕구에는 집단 수준의 욕구도 있을 수 있다. 비슷한 시기와 장소에서 많은 것들을 나누는 이들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 그중에는 욕구의 좌절도, 욕구의 고착이나 퇴행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집단 혹은 사회가 어느 순간 퇴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고착된 욕구가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집단 수준의 욕구 좌절이 있었다는 것은 시대와 사회의 아픔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모든 욕구의 충족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는 한 집단의 욕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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