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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 같은 자유민주주의
창작소설 같은 자유민주주의
  • 한명숙
  • 승인 2021.11.23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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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한명숙 논설위원 / 공주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한명숙 논설위원

최근 매체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에서 이 말은 어떤 의미인가? 자유 없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니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뜻인지,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민주주의를 비교하자는 뜻인지, 정체와 지향을 알 수 없다. 혹시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그 근원일까?

언어로 보면, ‘자유민주주의’에는 ‘창작소설’과 같은 이미지가 겹쳐진다. 특정인의 창작으로 탄생한 소설은 『홍길동전』과 『돈키호테』로 잡아보면 사백이 넘는 연륜인데, 우리는 1980년대까지 ‘창작소설’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했다. 영어권에서는 소설을 ‘Novel’이라 칭하지만, 우리에게는 『전우치전』처럼 지은 사람과 때를 알기 어려운 ‘고소설’과 『혈의 누』(이인직, 1906)와 같은 ‘신소설’이 존재하니, 이후 발달한 소설을 ‘창작소설’이라 구별하여 일컬었다.

이후 소설의 성장으로 ‘창작’이라는 수식어는 저절로 떨어졌다. 이에 따라 ‘창작소설’은 소설 발달 이전의 수사요, 초보의 명칭이자, 구태의 언어가 되었다.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어떨까? ‘창작소설’이 무슨 말이겠으며, 소설이 소설이니 ‘소설’일 뿐이다. 이 변모 과정은 ‘자유’라는 기본권을 ‘민주주의’에 안착시킨 흐름과 비슷하다. 소설이 작가의 창작으로 우뚝 섰듯이, 민주화 운동으로 민주주의가 자유를 안고 우뚝 섰다.

소설에 비하면 민주주의가 앳되기는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이 제정 공포된 1948년을 기준으로 보면 그 나이는 일흔셋을 넘겼을 뿐이다. 그러나 사백의 소설보다는 젊은 우리 민주주의가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국어사전에까지 안착하였으니, 오늘의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법치 등을 안고 있는 말이다. 일흔셋의 연륜으로 소설 문학보다 더 빛나는 발달을 이룬 모습이다.

2021년의 한국은 민주주의 초창기가 아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고 부른 지도 어언 사십여 년이 지났다. 독재 타도와 민주화에 희생한 피와 눈물이 자유의 꽃을 피웠다. 국민이 주인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자유를 누리는 시대이니,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글을 쓴다’라던 조지 오웰의 말은 의미가 있을지언정,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 무슨 비전이 있는가? 

혹여, 어설픈 착각이나 불순한 목적으로 신성한 말 앞에 ‘자유’를 붙인다면 성숙한 민주 의식으로 성장해 온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말에 담긴 사상과 정신이 민주 체제 이전이나 자유가 온전하지 못했던 시절에 앉아 있지 않다면,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붙일 까닭이 무엇인가? 이념의 편 가르기 의도일지, 정치 구태의 잔재일지, ‘평등민주주의’라도 찾아야만 할 것 같은 부조리가 아닌가!

자유 없는 민주주의를 누가 상상하랴! ‘창작’을 품고 있기에 말을 떼어 버린 ‘소설’처럼 ‘자유’를 안고 있는 상식의 말이 ‘민주주의’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넉 자로 꼿꼿하다. 소설 『1984』의 세상이 아니건만, 사족 같은 말을 엄중한 이름 앞에 붙이는 미망에 홍길동과 돈키호테가 웃지 않겠나? 대한민국 표준국어대사전이 풀이한 ‘민주주의’가 ‘창작소설’처럼 뒤뚱거리며 사라질 낡은 언어를 내다본다.

한명숙 논설위원
공주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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