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0:15 (목)
[학술대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주최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
[학술대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공동주최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6.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6-13 09:36:13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근대라는 기준점을 두고 근대성의 지향과 결여라는 해석 사이에서 오갔다. 그 가운데 목소리 높았던 해석은 근대 전령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이다. 중세가 끝나면 근대가 온다는 세계사적, 서구적 역사발전구도에 들어맞기 위해서라도 동학농민혁명은 일어나야 했던 셈이다. 반면, 당위 속에 왜곡되었던 혁명의 ‘제몫’을 찾아주기 위해 실증연구는 세계사적 위치짓기의 위험을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지난 1백주년 이후,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유영익의 ‘유교적 의거론’과 노용필 서강대 교수의 ‘동학사’와 ‘집강소연구’의 성과 속에서 서구적 의미의 근대지향성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5만 학살된 ‘제노사이드’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을 동아시아 인종학살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은 어떨까. 이른바 ‘제노사이드’는 2차 세계대전의 유태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는 과람한 해석이 아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21세기적 의미를 평화와 인권의 속사정에서 찾아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한승헌)와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회의 한국위원회(대표 강만길)가 공동주최하여 지난 1일부터 이틀동안 전주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백7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가 주목한 것이 이 지점이다.
한·중·일 삼국의 학자들은 이 날 학살과 진혼,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의 배후를 지적했다. 특히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는 ‘내부고발’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홋카이도대 교수의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학살’과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자대 명예교수의 ‘갑오농민전쟁과 일본’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보는 지표를 제시했다. 나카츠카 교수는, 현재까지도 일본정부 대량살육을 행했던 사실에 대한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있다며 강력한 항의의 목소리를 냈다. 실상 일본군에 의해 광범위한 인종학살이 행해졌다는 사실은 지난 1998년에 출간된 조경달 치바대 교수의 저서 ‘이단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岩破書店)에서 밝혀진 바 있다. 당시 그는 농민군 사망자가 5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논의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린 일본 제국주의의 책임문제로 선회하는 듯 보였다. 꿔웨이동(郭衛東) 북경대 교수의 발표 ‘동학당 起義와 朝·中·日 삼국의 외교활동’이나 강창일 배제대 교수(일본학)의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전쟁동원 및 수탈’ 등의 발표나 남경대학살, 일본의 대만 군사점령, 일본 오키나와의 황민화 정책에 대한 논의들에서 그런 조짐은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를 규탄하는 삼국 학자들의 공동성명이 채택되기도 했을 만큼, 가해국 일본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학농민혁명 내부탐색은 흔들리지 않는 논의의 축이었다. 흔히 ‘전쟁’이나 ‘봉기’ 등으로도 지칭되었던 ‘혁명’에서 농민들이 반봉건의 기치를 ‘자율적’으로 제시했다는 해석은 유효했다. 조경달 치바대 교수(역사학)는 발표문 ‘갑오농민전쟁의 이상과 현실’에서 이미 수많은 비판에 직면한 ‘민중의 자율성’에 대한 조심스런 주장을 펼쳤다. 농민들이 바랬던 것은 ‘一君萬民’의 유교적인 이상사회였지만 동시에 백성들 간에는 평등의 지극한 실현이 이루어진 완전무결한 이상사회였다는 것. 평등주의의 실현불가능을 예견했던 농민군 지도부와 농민군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연구자들이 오해를 빚어 ‘자율성’에 대한 해석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신용하 서울대 교수(역사학)의 저서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일조각)가 상정했던 자치적인 민중세력의 존재를 비판하면서도 전면부정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소산이었다. 사계의 평가에 따르면 오지영의 ‘동학사’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동학연구성과를 수용하여 왜곡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정개혁 12조목’이 부분적으로는 당시 민중의 전반적인 요구였을 것이라고 조 교수는 주장했다.
조 교수의 발표는 또 다른 질문의 맥을 타고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라는 화두였다. 그는 종합토론에서 ‘민중은 항상 투쟁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은 허구적 이미지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력 발휘하는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민중’의 일상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적 규모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조 교수의 질문은 ‘동학과 농민군’을 발표한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의 문제제기와 맥락이 닿아있었다. 최 교수는 “1894년은 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분리할 수 없는 연쇄 속에 얽혀있는 해다. 다시 말하면 갑오농민전쟁은 세계사적 모순이 동아시아를 매개로 조선의 국내적 모순과 결합하면서 폭발한 세계사적 사건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농민군의 일어섬을 기리고 그 좌절을 애도하는 단순한 봉기주의 모형으로는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장려한 서사시적 화폭은 결코 성취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최 교수는 평소의 지론대로 동아시아적 세계관을 지니는 것이 서구적 근대담론에 대한 기계적 대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제시했다. 최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동학·동학농민전쟁과 여성’을 발표한 김정인 서울대 강사에 의해 반박되기도 했는데, 김 강사는 “보편을 개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반성해야할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아시아라는 기준을 상정하기 이전에 국가별 연구가 시급하다고 갈파했다.

여전히 남는 근대극복의 과제

“동학농민혁명연구가 동아시아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박명규 서울대 교수(사회학)의 정리는 이번 학술대회의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합토론에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도쿄대 교수가 던진 질문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근대극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부논의를 지속시키기에는 아직까지는 허술한 골격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이 ‘일국만민’이라면 학살의 주인공 일본 메이지유신 시기의 정황과 유사할 뿐이라는 미야지마 교수의 지적은 한국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