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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자막
팬데믹 시대의 자막
  • 정보라
  • 승인 2021.11.16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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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을 이용한 실시간 화상 강의든 동영상 강의든 학생은 수업 진도가 빠르다고 질문하기 힘들다.
사진=위키미디어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수업을 처음 하게 되었을 때 수업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원래 모든 수업자료를 파워포인트 프리젠테이션으로 만들어 두었으므로 강의실에서 PPT를 띄우고 수업하는 것이나 화면에 PPT를 띄우고 수업하는 것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당황한 부분은 장애 학생 지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학, 러시아 문화 수업을 맡아서 한다. 노어노문학과는 학과 특성상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에서 온 외국인 학생이나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고려인 학생들이 많은 편이다. 다시 말해 내가 Zoom을 이용한 실시간 화상 강의를 하든 동영상을 만들든, 학생은 수업 진도가 빠르다고 중간에 손을 들거나 자유롭게 질문하기도 힘들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빠르게 말하면 그 내용을 곧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학생들 다수가 내 수업에 있었다.

그래서 2020년 1학기에 나는 한 학기 내내 수업 대본을 만들었다. 이 작업이 정말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었다. 수업자료가 없어 PPT를 새로 만들어야 할 경우에는 PPT부터 만들고 거기에 맞춰 대본을 만들거나 대본을 쓴 뒤에 주요 내용을 정리해서 PPT를 만들었다. 그러면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자료유출에 대한 걱정이나 학생들이 내가 쓴 대본을 베껴서 다른 수업에 보고서로 내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들을 수 없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그 학생이 다른 방법으로 수업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학생이 자기 의지로 공부를 안 하거나 자료를 표절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2020년 1학기는 정말 힘든 학기였다. 대본 쓰고 녹음하고 편집해서 동영상 만들고 업로드를 하고 나면 새벽 3~4시가 됐다. 그때는 이번 학기만 고생하면 될 줄 알았다.

학기가 끝났을 때 여러 학생이 내게 감사를 표했다. 한 학생은 비대면 방식 때문에 다른 수업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내 수업은 대본이 있어 수업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한 학생은 동영상 업로드 시간이 새벽인 걸 보면서 선생님이 정말 열심히 가르쳐 주신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앞으로 취직했을 때 직장에서 새벽 3~4시까지 일하라고 하면 고용노동청에 신고하고 파업하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나는 수업개선 보고서와 수업 자체 평가서에 장애 학생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썼다. 알고 보니 연세대에서는 장애학생 단체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기자회견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차별이 만연한 사회이고 장애인이 항의하면 대부분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

2020년 2학기에 나는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대본 작업을 중단했다. 그리고 올해 2021년 1학기 내 수업을 들은 학생 중에는 장애인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대본을 계속 썼어야 했나. 장애 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외국인 학생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마스크 대란을 무사히 넘겼을까. 백신은 예약했을까.

이런 고민은 강사들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학교는 교육기관이므로 학생을 교육할 의무가 있다. 학생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느냐 아니냐가 강사 개인의 시혜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팬데믹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학생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교육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니까 누가 쓸만한 음성-텍스트 변환 프로그램 좀 전국적으로 교육부 차원에서 지원해줬으면 좋겠다. 러시아어도 지원되면 더 좋다. 실시간 자막은 아직 꿈의 단계인 것 같지만 그 부분도 교육부에서 고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백년지대계가 자막에 달려 있다. 나는 진지하다.

 

정보라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이 글은 <대학: 담론과 쟁점> 10호에 ‘코로나 이후의 대학,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 기획 가운데 필자가 쓴 글을, 동의를 얻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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