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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책을 같이 만들면서야 깨달은 사실
학이사: 책을 같이 만들면서야 깨달은 사실
  • 신동원 카이스트
  • 승인 2005.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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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원/한국과학기술원·과학기술사

  최근 내가 근무하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수업발표는 놀랍다. 파워포인트를 현란하게 구사하는 것은 기본기에 불과하다. 영화 가운데 동영상을 캐치해 편집하거나 플래쉬 동영상을 만드는 작업도 그들에게는 쉬운 일인 듯 보인다. 어떤 학생 그룹은 아예 스스로 ?역사스페셜?을 만들어 방영하기도 한다. 그들 상당수가 시각 효과를 극대화하는 첨단기기를 능숙하게 다룬다. 이런 측면에서는 나잇살 먹은 선생은 도저히 그들의 경쟁자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들이 수업시간에 보여준 그 놀라움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없을까? 내가 학생들과 함께 책을 만들어 보겠다는 착상은 여기서 비롯했다. 첨성대·성덕대왕신종·고려청자·자격루·동의보감·수원 화성·대동여지도·우리과학 100년 등의 주제를 학생이 두 해전 내 한국과학사 수업의 결과로 발표했고, 적어도 내가 보기에 학생들의 모든 발표가 훌륭했다. 발표문에서 조금만 더 나간다면 어렵지 않게 책이 나올 듯싶었다.

  내가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표 때의 현란함을 거두어낸 순간, 그 안에 담겨 있는 알맹이가 발표형식만큼 알차지 않았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학생이 던진 질문은 아직 칼날처럼 예리하지 않았고, 그것을 엮는 논리는 백과사전의 평면적인 서술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막상 그들의 친구나 선후배에게 바로 들려주기에는 창의성이 부족했고, 재미가 떨어졌다. “아차! 내 괜한 일을 시작했나보다!” 일순간 후회감이 스쳤다.

  이후 학생과 같이 책을 만들면서, 힘들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독창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생생하고도 재밌는 글을 쓰게 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우리들 선생의 글쓰기에서도 그렇듯이, 학생들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 원칙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지식의 체화” 없이는 감동적인 글은커녕 남에게 읽힐만한 글도 못 내놓는다는 것이다.

  차츰 학생들의 글에서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 생겨났다. 그들이 현장 기행 또는 전문가 인터뷰를 마치고 온 후의 일이었다. 에밀레종을 예로 든다면, 학생은 종을 만드는 장인의 땀을 느꼈고 장인이 토로하는 기술적 난점을 들었다. 그 이후 그들은 성덕대왕신종에 대해 더욱 의미 있는 질문을 던졌고, 더욱 설득력 있는 대답을 찾아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문은 독창적이었고, 그 답은 유용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은 한, 두 개 참고문헌에서 뽑은 내용을 짜깁기하는 방식의 리포트에만 익숙해 있다. 의례 글쓰기란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컴퓨터 기술이 대중화하면서 그것을 써서 내용을 가공하는 능력은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취약하다. 우리의 대학 사회가 콘텐츠의 확보, 창의성 제고를 늘 고민하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은 편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구체성과 현장성의 강화, 이 두 가지가 관건이다. 거기서 학생들은 암기 또는 설명의 이해 단계를 뛰어넘는다. 이를 통해 지식을 체화하며, 자기의 견해를 내고, 스토리를 엮는다. 나는 그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도록 잘 이끌어주는 것이 창의적인 학습을 위해 선생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거기에 패기에 넘치는 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첨단기술 구사 능력이 잘 결합되어 나타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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