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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5] 19세기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역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5] 19세기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역들
  • 박홍규
  • 승인 2021.11.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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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셀므 베레그릭
유진 바를랑
폴 브루스
암셀므 베레그릭. 사진=위키미디어
암셀므 벨레그릭. 사진=위키미디어

프루동은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나키스트 사상가였지만 유일한 아나키스트는 아니었다. 1848년 혁명 당시 안셀므 벨레그릭(Anselme Bellegrique)이라는 무명의 혁명가는 프루동과는 완전히 별개로 '아나키는 질서다. 정부는 내전이다'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 중앙아메리카로 사라지기 전에 그는 1850년대에 출판을 계속하여 <아나키, 질서의 저널>(L'Anarchie, Journal de l'Ordre)이라는 제목의 잡지 두 호에 정부와 군대가 없이 코뮌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사회의 비전과 슈티르너파의 에고이즘 형태를 결합했다.

의사인 어니스트 코르드루아(Ernest Coeurderoy, 1825~1862)와 실내 장식가 요셉 드자크(Joseph Dejacque, 1821~1864)도 1848년 혁명에 참여했으며 실패와 추방의 비통함은 그들을 폭력과 야만의 종말론으로 이끌었다. 코르드루아는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은 인간 대홍수 속에서만 희망을 가질 수 있고, 혼돈 속에서만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는 일반 전쟁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고 선언했다. 드자크는 1858년부터 1861년까지 뉴욕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르 리버테러, 사회운동 저널>(Le Libertaire, Journal du Mouvement Social)을 편집했다.

그는 『혁명 문제』(La Question Rivolutionnaire, 1854)에서 '범죄적 수단에 의한 문명에 대한 전쟁‘과 비밀 결사를 옹호했다. 인간이 한때 신들에게 귀속했던 '과학의 홀'을 손에 쥐고 있는 휴머니즘(L'Humanisphire)에서 자신의 유토피아적 상상이 폭동을 일으키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본 그는, 각자가 '아나키 의회'에서 자신의 대표자라고 했다. 드자크의 '휴머니즘'은 푸리에의 '팔랑쥬'(phalansteries)와 유사하고 완전한 자유의 원칙에 기초하여 유사하게 경직된 계획을 반영한 것이었다. 

 

운동으로서 아나키즘의 시작

유진 바를랑. 사진=위키미디어
유진 바를랑. 사진=위키미디어

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1860년대 주로 프루동의 상호주의와 그의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De la Capacite politique, des classes ouvrieres, 1865)에 표현된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에서 본격화되었다. 노동자협회와 상호신용계획이 주요 발전 방향으로 간주되었다. 1860년대 말에 유진 바를랑(Eugene Varlin)이나 베니트 말론(Beniiit Malon) 같은 사람들이 제1인터네셔널의 프랑스의 모든 지역에서 상호주의에서 바쿠닌파 집단주의로 강조점이 이동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의 모든 지역으로 코뮌의 절대적 자치를 확대하자고 선언한 1871년 파리 코뮌은 이론상으로는 프루동주의의 연방주의를 옹호했다. 실제로 공공 서비스를 계속 유지하고 그 존재를 방어하는 것 외에는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유혈충돌 뒤에 아나키스트 중에서 바를랑은 총에 맞았고 루이 미셸(Louise Michel)은 유형지로 이송되었으며 엘리제 르클뤼(Elisee Reclus)는 투옥되었다. 

인터네셔널 내의 반권위주의자들은 코뮌을 연방주의, 반국가주의 사상의 자발적인 표현으로 보았고 혁명 이후 사회의 코뮌 재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강화했다. 1872년 쥐라의 연방위원회는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쟁점이 자유 코뮌과 국민국가 중의 선택이라고 보았다. 1875년까지 코뮌은 점차 신화가 되었다. <반역자>(Le Revolte)가 1879년 11월에 선언했듯이, “현대에 처음으로 파리 코뮌을 구성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나키스트 강령을 실제로 공식화한 사람들은 권위주의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코뮌 이후 10년 동안 모든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프랑스에서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스위스의 쥐라는 인터네셔널 총회에 대한 새로운 반대의 중심지가 되었고 초기 유럽 아나키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그 주요 지도자인 제임스 기욤(James Guillaume)은 파리코뮌과 프루동이 부여한 의미에서 연방주의는 무엇보다도 민족과 국가의 부정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연방 혁명에서 더 이상 국가도 없고,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집단보다 우월한 중앙 권력도 없고 집단의 연합에서 비롯된 집단적 힘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국가와 중앙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완전한 독립을 누리고 있는 코뮌은 진정으로 아나키라는 것이다. 

 

브루스 “노동자여, 기계를 차지하라! 땅을 차지하라, 농민이여!”

폴 브루스. 사진=위키미디어

1873년 몽펠리에대학교의 의과대학을 졸업한 폴 브루스(Paul Brousse)는 쥐라연맹에 가입하여 아나키즘에 과학적 근거에 부여하여 보다 호전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제2제국 말기에 공화파 반대파와 함께했지만 인터네셔널에 합류하면서 곧 마르크스와 일반 평의회의 반대자가 되었고 반권위주의 세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872년 인터네셔널의 몽펠리에 지부에서 추방되었다. 스페인에서 짧은 기간 망명하여 바쿠닌 사상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고 1873년 바르셀로나에서 봉기에 가담한 후 스위스로 이주했다.

크로포트킨은 그곳에서 브루스를 알게 되었고 그를 “정신 활동으로 가득 찬 젊은 의사, 소란스럽고, 날카롭고, 활기차고, 기하학적 논리로 모든 아이디어를 최대한의 결과로 발전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1874년 베른 인터네셔널 회의에서 브루스는 말라테스타와 카피에로가 혁명은 말보다 행동에 더 많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러시아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의 폭력에 발맞추어 브루스는 온건한 제임스 기욤과 갈등을 일으킨 '행동에 의한 선전'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베른에서 열린 바쿠닌의 장례식에서 기욤, 르클뤼와 함께 연설할 만큼 유명했다 같은 해에 브루스는 <노동자신문>(Die Arbeiter-Zeitung)을 편집하고 나중에 『쇼드퐁 아방가르드』(La Chaux-de-Fonds L'Avant-Garde)로 출간했다. ’집단주의, 아나키, 자유연방‘이라는 표어 하에서 후자의 기관은 계약에 기초한 사회에 의한 국가의 대체와 각각의 필요와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의 자유로운 연합을 요구했다. 저널이 주창한 전략은 극도로 폭력적이어서 반란에 의한 코뮌의 창설을 요구했다. 투표함을 버리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조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모토는 '일어나라 사람들이여, 당신의 힘으로!/ 노동자여, 기계를 차지하라!/ 땅을 차지하라, 농민이여!'이었다. 

가장 활동적인 아나키스트 조직가이자 투사 중 한 명이 된 후 1880년 프랑스로 돌아온 브루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넘어가 공장입법과 지방정치를 통해 개선을 추구하는 '가능성'이라는 개량주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1883년에 쓴 <이상>은 “몇 가지 실제 단계로 나눠지고 우리의 목표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도록 즉각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80년대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조직이 된 가능성주의당을 결성했다.

 

아나키 공산주의의 발흥

사회주의 내에서 별개의 가닥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10년이 시작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1876년에도 쥐라연합의 기욤은 '아나키스트'와 '아나키'라는 용어가 부정적인 생각만을 표현하고 '비통한 모호함'을 초래한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르클뤼는 용어의 문제점은 관심을 끌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연방은 집단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동했다. 아나키 공산주의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주네브에 거주하는 프랑스 망명자 프랑수아 뒤마르트레(Francois Dumartheray, 1842~1931)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1876년 『정치 행동의 육체노동자에게』(Aux Travailleurs manuels partisans de l'action politique)를 발표했다. 1876년 10월 아나키 공산주의는 피렌체 회의에서 이탈리아 연방에 의해 채택되었고 말라테스타와 카피에로는 스위스로 여행을 가서 스위스 동지들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1876년 기욤은 소책자 『사회조직의 이상』(Idies sur l'organization social)에서 혁명 후에는 노동에 따라 엄격하게 관련될 필요가 없이 부와 소비가 일반적으로 분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자신이 1889년까지 이 교리를 모른다고 주장했지만, 이듬해 라쇼드퐁에서 열린 쥐라연맹 회의에서 그의 주장에 따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1881년 프랑스에서 정치활동에 대한 제한이 옮겨짐에 따라 아나키즘은 처음으로 식별 가능한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활동가 그룹이 나타났다. 

<신시대>. 사진=위키미디어

<전복>(La Revoke)과 <신시대>(Les Temps Nouveaux)를 편집한 구두공 장 그라브(Jean Grave)는 유능하고 지칠 줄 모르는 선전가였다. 에밀 푸제(Emile Pouget, 1860~1931)는 아나코-생디컬리즘의 선두주자로 등장했다. 예수회 신학자였던 세바스티안 포레(Sebastien Faure)는 일련의 팸플릿을 통해 아나키스트 이론을 대중화하고 1950년대까지 계속된 <리버테르>(Le Libertaire)를 창간했다.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크로포트킨은 이 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고 그는 특히 <반역자>(Le Revolte)과 후계자격인 <반역>(La Revolte) 같은 주요 아나키스트 저널에 글을 기고했다. 그의 작품 중 많은 부분이 프랑스어로 처음 등장했다. 지리학자인 르클뤼는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여 아나키즘 대의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형제 엘리(Elie)도 자유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인류학의 발견을 사용하여 <원시주의>(Les Primitils, 1903)에 대해 썼지만, 그는 과거의 신화와 종교에 점점 더 비관적인 관심을 보였다. 르클뤼는 낙관주의자로 남아 19세기 말에 가장 유능한 프랑스 아나키즘의 대표자가 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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