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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풍경] 계간지 여름호의 어떤 경향
[책들의풍경] 계간지 여름호의 어떤 경향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06.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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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2 16:48:36

계간지 여름호들이 일제히 출간되었다. 개혁과 반개혁의 기로에 선 정치적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들 계간지의 담론은 자못 예각적이다. 계간지가 현실에 대한 일정한 담론적 거리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번 여름의 계간지들의 특징은 현실에 더 가까이 더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작과 비평'은 '통일과정과 개혁과제'를 특집으로 브루스 커밍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등의 필자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보다 더 '현장중심적인' '당대비평'은 시장의 논리가 초래한 삶의 위기를 성찰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영미식 자본주의, 시장주의적" 경제개혁이 가져온 파괴적 결과, 건강권의 위기,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위주체'에 관한 이 잡지의 연속기획으로 '장애여성'이 등장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

국가의 '통제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계간지 여름호들을 관통하는 주제중의 하나는 이른바 '권력담론'이다. 표적이 된 '권력'은 담론 내부에, 그리고 외부에 엄연한 현실로 있다. 우선 학술지적 성격을 탈피, '비평지'로 전환한 '사회비평'의 기획이 눈에 띤다. 이 잡지의 변신은 일단 성공적이다. '통제권력의 시민 길들이기'와 같은 특집을 통해 '진지전'을 모색하면서, '영어의 정치학', '서울대 개방화 가능한가' 등의 쟁점기획으로 '기동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方外의 철학자에서 담론전사로 귀환한 김진석 교수(인하대 철학)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가 '통제권력'이라는 문제설정을 예각화하기 위해 소재로 택한 것은 이채롭게도 '마약'이다. 대담자로 초청된 '상습마약복용자'인 가수 전인권은 주간인 김진석 교수와의 대담에서 "국가가 개인의 외로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외로움을 달랠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한다. 김 교수는 마약을 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나쁜 습관을 가졌을지언정 그 행위만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명백히 아니다"라며, 마약에 대한 금지와 처벌은 "맹목적 마녀사냥이거나 광신적 준법주의"라고 비판한다. 마약을 둘러싼 문제상황속에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 개인이 자발적으로 처벌과 금지를 내면화하는 도덕주의, 의학적 지식으로 강제적인 치료를 행하는 '치료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근대적 주체가 마약앞에서는 개인의 자율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통제권력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없는가? 김 교수는 개인주체의 자기성찰과 훈련을 통해 해방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특집의 다른 참여자들은 "민중통제권의 확보" 나 "지역사회의 참여와 통제"를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결론은 개인의 자기성찰성 회복과 주체화로 수렴된다. 결론격의 글에서 진중권은 후기 푸코를 빌어 "자기 내면의 권력의지를 활용하여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체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미학의 실천"을 역설한다.

통제권력의 문제가 담론 '밖'의 문제설정이라면, '역사비평'에서 홍윤기 교수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담론내부와 권력과의 상관관계이다. 그는 10월 維新의 명명자이자 국민교육헌장의 기초자인 박종홍 철학을 "철학과 권력의 퇴행적 결합"으로 규정, 현실에 대한 순응주의이자 권력비판이 결여되어 있는 '국가철학, 민족철학'이라 비판한다. '정의'의 문제를 사회적 가치판단을 배제한 '개인적 성실'로 환원시킨 박종홍 철학은 파시즘에 순응한, 파시즘과 동거했던 철학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 "도덕적 완성을 개인적 차원에서 추구하여 어느 정도 성공한 이의 자기확신에서 오는 가장 큰 실천적 불행은 자기가 성공적으로 확보한 개인도덕적 현실을 타인에게도 전이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착하고 아름답게 산 이의 파시즘은 착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문학권력론에 대한 반격

지난해 문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른바 문학권력론과 강준만 교수의 인물비평을 겨냥하고 있는 '문학동네'의 특집 '비평과 권력'은 그동안 문학권력의 한 핵심으로 지목되었던 이 잡지의 '반격'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논자들은 공통적으로 '권력담론의 과잉'을 지적하며, 이 담론을 추문화하고 있다. 그것은 비평의 본령이 아니며(장경렬), 객관성의 지평이 결여되어 있고(윤지관), 문학에 무지한 논자들의 폭로저널리즘(남진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먼저, 장경렬 교수(서울대 영문학)은 비평의 근원적 자기성찰성을 문제삼음으로써 문학권력논쟁이 가진 허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비평과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상황에 대처하여 비평가 자신이 수행하는 자기비판 또는 내적 성찰"이라 주장한다. 윤지관 교수(덕성여대 영문학)는 문학권력론을 제기한 논자들을 향하여 "푸코에 들린 사람들"로 폄하한다. 기초적 독해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권력을 모든 곳에 편재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권력의 토대와 근거를 문제삼지 못하고 결국 "권력에 대한 저항은 원인무효가 되고, 남은 것은 사적이 된 개인들 사이의 '만인을 위한 만인의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인물과 사상'의 지면을 빌어 강준만과 논쟁을 주고 받았던 비평가 남진우는 강준만을 '흥행사적 지식인'이자 '지적 엔터테이너'로 규정하고, 이른바 '폭로저널리즘'이 '텍스트비평'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남진우의 글은 강준만의 저널리즘 비평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지만, 언론개혁과 지역주의 비판 등 강준만 교수의 타당한 문제제기마저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문학권력을 둘러싼 시비는 그 개념의 모호성과 문단내의 추문과 어울려 그다지 생산적인 토론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엄밀한 '비평'의 범주인지 '문단정치'에 대한 현상진단의 개념인지 저널리즘적 비판을 위해 동원된 수사인지 합의된 바도 적절히 규정된 바도 없다. 그것이 '비평'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글쓰기 혹은 문학행위에 내장된 권력적 속성을 새삼스럽게 환기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의 문학지형에서 쓸모 없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논쟁이 과연 생산적 토론으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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