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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와 '로마노 전투'의 거리
'게르니카'와 '로마노 전투'의 거리
  • 고종희 한양여대
  • 승인 2005.08.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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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예술: (3) 화가들, 전쟁의 참상 고발하다

차이의 예술 3_화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다

마드리드에는 세계적인 규모의 미술관이 두 곳 있다. 하나는 프라도 미술관이고 다른 하나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다. 프라도는 한때 세계를 정복했던 스페인 제국의 국력을 말해주듯이 15세기~19세기까지 미술사의 걸작들로 가득하다. 특히 스페인이 낳은 거장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대표작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고야의 수십 점에 이르는 회화는 이 박물관의 존재의 이유라 해도 좋을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마드리드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이었는데 1992년 이후 1위 자리를 레이나 소피에 미술관에 넘겨주어야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왔기 때문이다. ‘게르니카’는 1981년 42년 만에 뉴욕에서 고국인 마드리드의 프라도로 옮겨졌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2년 거기서 멀지 않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기 시작한 날은 1937년 5월 11일이었다. 그날은 스페인의 반군 지도자 프랑코와 독일의 나치, 그리고 이탈리아 파시즘의 합작으로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무차별 폭격(1937년 4월 27일)을 당한지 2주가 지난 후였다.


‘게르니카’는 폭 7.76 미터에 높이 3.5미터의 大作으로서 1937년 파리 엑스포의 스페인 관에 전시시키기 위해 제작됐다. 폭격당한 마을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이 작품을 통해 화가는 전 세계에 나치의 폭력성과 반군의 부도덕성을 고발했다. 하나의 예술품이 이 같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예술품에게만 헌정된 특권이다.


이 거대한 그림 앞에 서는 순간 절실함, 처절함, 분노와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이 같은 그림을 위해 색을 쓰는 것은 사치라 느껴지니 무채색으로만 표현한 화가의 선택은 적절한 듯 하다.


그림 왼 편에는 스페인의 전통적인 투우가 보이고, 화면 중앙에는 투우장에 등장하는 말이 머리를 뻗어 울부짖는 모습이 보인다. 투우장에서 황소와 말은 모두 죽을 운명이다. 오늘날에는 말에 두터운 가죽을 씌우기 때문에 황소가 뿔로 받더라도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지만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만 해도 말에 보호 가죽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말은 황소의 뿔에 찢겨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게르니카 마을의 대학살을 피카소는 스페인의 전통이자 죽음의 스포츠인 투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황소 아래에는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이미지는 신양성서에 등장하는 ‘무고한 영아들의 살해’를 연상시킨다. 얼마나 많은 화가들이 이 주제로 자식 잃은 어미의 비통함을 표현해왔던가. 피카소는 이 전통적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한 듯하다. 그 아래 거대한 병사의 죽음이 보이고, 오른 쪽 창에서 한 여인이 팔을 뻗어 불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목숨을 불사하고 이 모든 것을 증언하려 하는가. 마지막으로 오른 쪽에서 두 팔을 벌리고 절규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추상에 가까운 이미지를 통해 항거와 절규, 슬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주의 보다 더 강렬하게 보는 이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역시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으며 작품의 제목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스 군에 의해 처형당한 날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프랑스 군인들은 일렬로 서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등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보인다. 그 앞에는 끌려 온 수백 명의 인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죽음의 향연이 계속 된다는 의미다. 땅 아래에는 이미 처형당한 시체들이 처참하게 널부러저 있고 바닥은 피로 물들었다. 양팔을 벌리고 지금 막 총살당할 차례가 된 이 남자가 그림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분노에 떠는 것처럼도 보이고 공포에 질린 것처럼도 보인다. ‘게르니카’의 오른쪽 화면에서 양팔을 들고 절규하는 이미지는 바로 고야의 이 남자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 앞에 세워진 사각 등은 주인공의 흰 셔츠와 노랑 바지를 눈부시도록 비추면서 이 모든 것을 폭로하고 있다. 

 
이 그림을 고야가 그린 것은 이 사건이 있는 지 6년 후였다. 1814년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에서 추방되고 새 정부가 들어섰는데 고야는 새 정부의 후원 아래 6년 전 시민들의 용감한 항거를 그린 것이다. 그러니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때의 심정은 피카소와는 다소 달랐을 것 같다. 두 그림 모두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폭로이기는 하나 고야는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사건 발생 당시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희생을 목격하긴 했으나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승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고야의 위대함을 희석시키지는 못한다.


모든 戰爭畵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가. 1456년 피렌체의 화가 파울로 우첼로가 그린 ‘로마노 전투’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우첼로는 이 그림을 메디치가의 주문에 의해 그렸다. 주제는 피렌체가 시에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노 전투다. 말들이 쓰러져 있고, 화면 전체에 역동감이 흐르는 것은 사실이나 그림 어디서도 전쟁의 잔인함이나 폭력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잘려진 창들은 정확한 소실점을 따라 규칙적인 방향으로 배치되었고, 쓰러진 병사 역시 단축법에 의해 그려져 있어서 현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며, 앞서 피를 토하며 죽어간 고야의 인물과는 너무도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첼로가 여기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피렌체 군의 자랑스런 승리였으며, 거기에 보너스처럼 당시 그를 열광시켰던 수학적 원근법에 온통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피카소와 고야는 한 편의 그림으로 전쟁의 무자비함을 고발했다. 오늘날에도 전쟁의 참상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 규모가 커지고 있으나 예술가들은 더 이상 과거 고야나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고발자의 역할을 맡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화씨 9.11’과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역할이 영화감독에게 넘어간 듯도 보이나, 그 영향력은 ‘게르니카’가 보여준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고종희 / 한양여대·미술사

필자는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번안판화의 실태와 문제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고종희의 일러스트레이션 미술탐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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