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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란 질병, 지성의 패배주의
‘침묵’이란 질병, 지성의 패배주의
  • 최재목
  • 승인 2021.11.02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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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최재목 논설위원 /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논설위원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공생해오는 동안 대학사회도 많이 변했다. 지성의 형식과 방향마저 도도하게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이 전염병은 ‘철학적 질병’이라 불러야겠다. 거리두기, 비대면을 통해서 대학은 대화보다는 침묵을, 어울림보다는 따로-홀로를 권했다. 사회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를, 나아가 정치적 거리를 만들었고, 비판과 소요를 무력화하는데 기여했다. 

대학 밖은 불교의 ‘오탁’(五濁)을 거론할만한 아사리판, 아수라장이 되어 시끄러웠지만 대학 안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입은 닫고 그 위에 마스크로 한 겹을 더 틀어막았다. 침묵은 미덕이 되었고, 대면, 토론, 대화는 자제되거나 금지되었다. 모든 것은 전염병 ‘탓’으로 돌리면 OK. 은둔이건 도피건, 회피건 잠적이건,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이런 이유로 대학 내의 ‘정치 비판’의 분위기는 합법적으로 거세되었다. 전염병 기간 동안 학생들의 토론, 대화 능력은 현격하게 저하되었다고 본다.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게 급기야 말을 못 하게 만들어놓았다. 빛 속에서 만물의 형체들이 드러나고 생육하듯, 언어활동을 통해 인간의 삶은 생동감 있게 ‘결’과 ‘무늬’를 만들어왔다.

반면에 침묵은 어둠이나 혼돈과 같아 오래 지속되면 될수록 구술 및 서사 능력을 퇴화시켰다. 침묵은 언어 능력을 정지시켜 수시로 떠들어댈 수 있는 ‘나’(주체)를 무(無)라는 사유의 혼돈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결국 논리와 사고, 비판과 논쟁의 퇴행을 용인하여 ‘아무 생각 없음’이나 ‘판단 중지’를 정당화해준다. 마치 묵비권 행사처럼, 활발한 내적 표현을 주저하고 자발적으로 보류하는 이른바 지성의 빙하기를 만들 소지를 제공하였다.  

수다와 잡담, 토론과 논쟁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의 ‘의미 있는 생명의 잡음’이거나 지성의 바탕이 되는 ‘근원적인 소리’이다. 삶에서 소음과 잡음이 없을 수 없듯, 대학에서 끊임없이 활발한 언론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도 특정의 언론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론 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하고 비판하는 이른바 ‘타지 않는 혀’를 대학은 지켜가야 한다. 함성호 시인이 최근 시집에서 말한 “결국,/내 몸을 먹고 자라/타지 않을 혀” 같은 비판과 논쟁의 혀 말이다.

특정의 소리나 소음이 일방 통행하여 모든 것을 장악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의미 있는 소음과 잡음을 소란스럽다는 이유로 소거, 퇴출할 이유는 없다. 코로나19를 핑계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정당화될 수 없다. 교문을 닫고, 강의실 문을 걸어 잠그고, 입을 닫고, 거기에다 마스크를 단단히 씌워 이중삼중 침묵의 바리케이드를 치는 동안 대학의 언론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대면을 회피하는 일이 ‘인면(人面)의 공포’로부터 도주하는 방법이 되고,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도 ‘사람과 함께, 사람 곁에서 사는’ 연습을 포기하는 꼴이 돼서는 안 된다. 

마침내 대학 지성의 패배주의, 언론의 허무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전염병 대비책이라면 이제 과감하게 재조정되어야 한다. ‘왜 사람들은 복종하는가?’ - 16세기 프랑스의 18세 청년 라 보에시가 했던 질문을 애써 회상해본다. 비대면, 침묵의 풍조가 대학에서 ‘자발적 복종’을 습관화하고 언론의 자유를 망각케 하는 일이 된다면, ‘침묵은 질병’이고 그것이 ‘지성의 패배주의’를 초래했다고 힘써 외쳐대야 할 것이다.

최재목 논설위원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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