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5:25 (토)
김윤식을 다시 논하며: ①김윤식 비평의 예술성에 대하여
김윤식을 다시 논하며: ①김윤식 비평의 예술성에 대하여
  • 송희복 진주교대
  • 승인 2005.08.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홀경에로의 길 찾기…끝없는 도정의 인간문화재

송희복 / 진주교대․문학평론가

양주동은 자칭 국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세인들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자칭이라기보다 세칭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양주동이 국보급 학자라면, 한 정신과의 의사가 말한 바있었거니와, 김윤식은 인간문화재급 학자이다.

학자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속물이 될 수 있다. 바람을 피우며 노름도 적당히 즐기며 부동산에 때로 투기하고 총장 자리를 기웃거릴 줄 아는 그런 속물 말이다. 옛말에 小人閑居不作善이라고 했듯이, 정치가가 타락하면 정상배가 되고, 의사가 돈맛을 알면 인술을 모르고, 교수가 세속의 ‘짓거리(부작선)’에 빠지면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윤식은 현실에 한가로이 안주하지 않았던 희귀한 딸깍발이임에 틀림이 없다. 시인 고은의 표현을 빌자면, 온통 그의 의식 속에는 박물관 지하실 명제들이 줄 서있었다. 주지하듯이 학문의 도정은 끝이 없다. 그는 자아의 영혼을 입증하기 위한 행려를 쉬지 않고 실천하였다. 그가 인간문화재로 비유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방대한 내용과 정치한 體裁의 실증주의적인 비평사 연구 외에 김윤식의 비평적 심미관을 다소간에 드러내고 있는 일련의 작업도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의 비평적 미의식은 ‘문학과 미술 사이’(일지사 刊, 1979)에 거슬러 오른다. 그는 해외여행을 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다녔다. 로댕의 발자크상, 백제관음, 계산행려도 등의, 시대를 초월한 명품을 감상하면서 그가 인생과 예술에 관한 깊은 상념에 빠진 것은 문학동네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근면성은 글쓰기로 드러난다. ‘문학과 미술 사이’가 間텍스트성에의 비평적 인식으로는 우리나라의 비평사에서 초유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1971년 어느 추운 날에 앙드레 말로가 극찬해 마지않았던 백제관음 앞에 서 있었다. 그때의 그가 겪은 것은 일종의 절망이었다. 이 절망은 미의 세계 앞에서는 민족의 개념도 초월한다는 것과, 그 자신에게 관음의 이미지가 세속의 여인상으로부터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였다. 그 절망은 다시 말해 근대성이란 거대한 관념 덩어리가 지니고 있는 인식틀과 발상의 전환을 필생토록 넘어설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또한 자신의 문학이 종교의 초월적인 세계로 도약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한 예감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특별한 근거도 없이 백제관음의 한반도 전래설을 부인한 앙드레 말로의 경솔한 단정에 비할 때, 그의 절망은 겸허하면서 진지하다고나 할까.

김윤식의 절망은 10여년 후에 이르면 환각의 체험으로 일쑤 변용된다. 이 역시 그에게 있어서 독특한 예술 체험이다. 그의 비평적 심미안의 한 정점에 도달한 저서 ‘황홀경의 사상’(홍성사 刊, 1984)에서 보여준 환각의 체험. 그가 여기에서 “‘도화원기’가 ‘小國寡民’의 이데올로기를 선명히 드러내었음에 비해 ‘몽유도원도’는 지극히 비정치적인 신선사상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을 때 나에게는 그의 자신감, 확신에 압도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노자는 위정자가 無爲에 이르고 백성이 무지․무욕의 경지에 안주한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고 했다. 이 세상이 바로 도연명이 꿈을 꾸던 소국과민의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이에 비하면 ‘몽유도원도’는 개꿈이요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꿈이 인간을 때로는 영혼의 끝 모를 심연으로 내몰기도 한다면, 예술은 공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인간은 예술을 통해 공포에 대한 참을성을 키우고는 한다. 릴케가 이와 비슷한 내용의 시를 썼고, 이것이 젊은 시절에 ‘파리 시절의 릴케’를 번역한 바 있던 김윤식에게는 비평적 심미관을 형성하게 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황홀경의 사상’ 제1부에서는 김윤식 비평의 예술적인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비평의 한 진경을 보여주었다고 할까. 그가 비평가로서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루카치 등을 통해 황홀경의 사상을 발견했다기보다, 이 사상은 어느덧 자신의 몫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 스스로도 황홀경의 사상가가 되었던 것이다.

김윤식 비평의 심미관은 요컨대 환각의 체험이요, 황홀경의 사상이다. 해외여행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던 시대부터 미술의 명품을 집요하게 찾아 다녔던 그의 감상벽은 자기 사상의 틀을 조성하고 확장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윤후명의 소설 세계를 비평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었다.

▲돈황의 막고굴 전경 ©

   “그 자체가 비단길의 환각이었다. 비단길의 환각, 막고굴 속의 호선무 추는 천녀와 부처님들은 그 자체가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환각 자체였던 것. 그 때문에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이 아름다움을 두고 그는 돈환의 또는 누란의 ‘사랑’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환각 자체를 그는 사랑이라 착각해버렸던 것. 그만큼 그 환각은 절대적이자 실체의 일종이었다.”(‘작가와의 대화’, 문학동네 刊, 1996, 214쪽)

주지하듯이 김윤식은 평전적 작가 연구의 대가이다. 이광수에서 김동리에 이르는 방대한 성과는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가 途上의 작가를 대상으로 단편적인 작가론을 끊임없이 써온 것도 열정 못지않게 비평적 현장 감각 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의 작가론을 지배하는 배후의 거대한 힘은 루카치의 미학 사상이다.

그에게 있어서의 루카치는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 얄팍한 두께의 명저 ‘소설의 이론’은 그가 생애를 두고 실천적으로 검증해야 할 일종의 화두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할 앞길을 창공의 별이 지도가 되어 주었던 시대는 그 얼마나 행복했던가. 하나의 내밀한 잠언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명저는 김윤식의 글쓰기 도처에 흔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다. 인류사에서 근대의 등장은 신이 지상을 떠났고 또 지상이 낯설고 황폐화됨으로써 비롯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설은 근대 이래 이루어진 황폐한 땅의 서사문학이다.

   “오정희 소설의 참주제는 회상이다. 루카치의 용어로는 창조적 기억이며 벤야민에 의하면 회상이 된다. ‘중국인 거리’는 기억이 만들어낸 환상이었고, ‘유년의 뜰’도 창조적 기억의 힘에 의존했다. 훼손된 세계에서 참된 가치를 찾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창조적 기억 즉 회상의 형식이 의미를 갖는다. 비평가들이 오해하거나 당황하기 쉬운 ‘별사’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인용문은 내가 김윤식의 ‘운명과 형식’(솔 刊, 1992)에 있는 오정희론을 요약한 것이다. 그의 소설 미학의 수준을 기본적으로 루카치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음이 자명해진다. 그의 ‘창조적 기억’은 오정희의 경우뿐만 아니라 박완서 등을 다룬 여러 작가론에서도 두루 적용된다. 김윤식의 작가론 가운데 비평의 심미안을 한껏 고양시켰다고 할 수 있는 저서 ‘작가와의 대화’(문학동네 刊, 1996)는 그의 대표적인 현장비평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기억에 의존한 글쓰기는 소설가의 특권으로 간주된다. 유년기의 체험과 작가의 기억에 의존한 ‘태백산맥’을 두고 ‘작가의 승리’라고 다소 과대평가한 것도 이에 연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서정인의 소설 ‘달궁’을 가리켜 시적 呪縛에서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선험적 고향 상실’의 문학이라고 했다. ‘달궁’의 판소리적인 특징은 한국판 호메로스의 서사시로 비유된다. 이 대목에서 한정하자면, 소설이란, 다름이 아니라 허구적인 기억의 소산인 동시에, 기억의 묘사력이 빚어낸 환각의 다채로운 빛이리라.

김윤식은 말했다, 미란, 인간의 혼자 있음과 불완전함이라는 의식 속에서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환각인 것이라고(‘작가와의 대화’, 129쪽 참고). 이처럼 그의 미의식의 기원은 고전주의를 훌쩍 지나서 그리스적인 조형예술에 있었다. ‘문학과 미술 사이에서’ 이래 지금껏 변한 바 없는 신념이었다. 그리스로 파악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된 루카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토대를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는 소위 ‘토대환원주의’의 강도는 루카치를 능가하기도 한다. 예술의 애매성을 일소시키는 논리의 명쾌함 때문이다. 이는 김윤식 비평의 도저한 일관성이자 결정적인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김윤식은 美文을 우습게보거나, 논리적인 글을 가볍게 여겼다. 기성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라는 강박증 때문이었을까. 끊임없이 이어져가는 사색의 궤적만이 비평문이라는,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는 전통을 후학들에게 남긴 것은 아닐까. 비평은 때로 자유로운 漫筆이나, 가벼운 소품의 읽을거리인 칼럼이나, 논리적으로 엄정한 학술적인 에세이 등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안한 형식의 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평문도 완결된 글쓰기의 결과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비평의 불안이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는 산문집에서조차 자기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관습을 극도로 자제했다. 비평적 글쓰기에서의 자아의 消去는 명백하게도 모더니즘적이다. 글쓰기의 실제에조차 거대담론, 혹은 근대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그였다.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자기노출(self-disclosure)이 요구되는 시대에 스스로의 개방을 거부하는 것이 타인(독자)을 배려하지 않는 남근주의적인 글쓰기의 관례는 아닐는지…. 물론 그가 최근에 와서야 자전 에세이의 양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거니와, 독자와의 화해나 대화 등을 통한 자기 응시 내지 관조는 한편으로 스스로의 변화에 대한 허용 및 관용이 된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비평이든 학문이든 간에, 계량적인 의미에서의 그의 업적은 실로 다대하다. 等身大를 훨씬 넘긴 저작물을 미루어 본다면, 김윤식 이전에 김윤식이 없었고, 김윤식 이후에도 김윤식은 없을 성 싶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우리 비평계의 언덕길에 우뚝 서있는 큰 기념비가 아닐 수 없다. 이 그늘 아래 많은 후학들이 안주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언덕 너머 아득한 곳의 지평 끝 간 데에, 탈이념의 微視 세계관, 문화연구적인 모험과 개척정신, 계량의 가치보다는 ‘질적 연구’의 의미를 긴요하게 여기는 새로운 비평관 탐색의 길이 놓여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송희복/ 진주교대, 문학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