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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7.02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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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진단: 풍요 속의 빈곤 구가하는 학술대회 풍경

우리 시대에 학술대회는 무엇인가. 너무나 많은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지만 뭔가 지적인 자극으로 충만한 경험을 안겨주는 행사는 지극히 드물어진 것이 우리시대의 풍경이다. 단순히 언론이 좋아할 만한 자극적 비판을 생산하는 것이 과연 학술대회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학술대회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갖고 한단계 높은 공론을 만들어나가는 학문적 행위가 연장되는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학술대회는 학자들이 서류상에 채워넣어야 할 논문발표 횟수를 늘리기 위한 프로필 관리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변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누구도 나서서 문제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언론에는 연일 신생학회 탄생 축하보도가 나오고, 프레스센터에는 일요일 결혼식장처럼 학회들이 줄줄이 대회를 이어나가는데도 학회의 진정성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과거 진보적 학술담론을 생산해서 대중들에게 행동의 지침과 강령을 제시하던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시대와 학문을 고민하는 학자들‘만’의 공간으로서의 모습도 점점 잃어간다는 탄식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런 우려의 핵심엔 학술대회 논문의 질적 저하현상이 도사려 있다. 최병두  대구대 교수(지리학)는 “교수들이 작심하고 발표하는 게 아니라, 대학원을 갓 졸업한 젊은 사람들이 주로 발표하니까 교수들이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예전에는 기성교수들이 했던 얘기 또 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요즘은 교수들이 자신과 무관하다는 식으로 학회 참석을 아예 꺼린다는 것이다.

논문의 질 점점 저하돼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는 “인문학 학술대회는 거대화되면 안된다”라는 시각을 보여준다. “소규모는 잘 된다. 하지만 요즘 학진이 발표회를 대형화시키고 있어 밀도가 점점 떨어진다”라고 관찰한다. 강 교수는 특히 후배들에게 느끼는 학문적 위기감을 털어놓는다. “한문학계는 30대로 내려갈수록 수준이 점점 떨어진다”라며 “우리가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고동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한국사)는 정곡을 찌른다. 웬만큼 읽을 만한 내용을 담은 논문들이 대개 10년 정도는 아이디어를 묵히고 삭혀서 발효시켜내는 것인데, 그리고 그 연속선에서 한편, 두편, 세편이 발표되고 이것이 토론되고 쟁점화되어야 하는데, 대부분 학술대회가 ‘기획성’으로 가다보니까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짜내다보면 글도 틀어지고 메시지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실감나게 느껴지는 학회의 위기는 참석자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여기엔 많은 분과학회들이 생겨서 전공분야만 챙기는 실속파들이 늘고 있다는 게 큰 원인으로 꼽힌다. 최병두 교수는 “전문성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기 논문이 실리는 곳만 참석하는 것은 문제”라고 그 이중성을 짚는다. 고동환 교수도 “지형의 문제로 봐야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학제간 논의틀이 안된 것이 문제이면서도 전문성이 없으면 학회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 일부 교수들은 “시민토론회 등 청중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 대중적인 주제로 학술대회를 시도해볼 수 있는데, 요즘은 청중도 동원하는 습관이 생겨서 순수하지 못하다”라고 털어놓는다.

참석자 수도 점점 줄어

그래도 사회학회, 정치학회, 국어국문학회 등 인문사회계 대형학회들은 전국대회를 매년 한두번씩 열어서 최신의 우량논문들을 공유하는 자리를 갖기 때문에 잔칫집 분위기가 아직 지속되고 있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사회학)는 “분과소학회들을 모학회 속으로 들어와서 활동하도록 유도했고, 나름대로 잘 되고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한다.

그런데 이공계 쪽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정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원은 “인적자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場들만 많아지고 학회는 작아진다”라며 “여러가지 이기적인 문제 때문에 통합하기 어렵다”라고 밝힌다. 백인성 부경대 교수(퇴적학) 또한 “학회가 분화되고 참석인원도 영세화되다보니 학회지의 질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다”라고 말한다. 제갈종건 한국화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작은 학회들이 너무 많고, 전부 중복적이다. 회원으로서 경제적 부담도 많다”라고 하소연을 한다. 제갈 연구원은 “감투 때문에 학회를 자꾸 쪼개는데 빨리 시정되어야 할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순히 머릿수가 적다고 학회의 위기가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10여명의 참석자들이 거의 학회 운영진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재현 서울대 강사(철학)는 “학회 나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운영진만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어차피 전공자들 모임이니 홍보도 별로 하지 않고, 딴살림 차린 이들에게 참석을 요구하기도 힘드니 결국 모이는 이는 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이럴 때 학회는 ‘동호회’로 점점 퇴락한다. 

열기없는 형식적인 진행

그 다음은 토론에서의 현장성 상실이다. 인터넷 시대에 학술대회는 최신정보를 얻는 공간으로서의 성격보다는 각자 수집하고 관리하는 정보들에 대해 전문가들과 직접 만나서 확인하고 생생한 대화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그 성격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점점 형식화되고 있어 문제라며 “오랄(oral) 중심의 학회가 되자”는 의견이 많다. 요즘 빈번해진 것이 외국학자들을 초빙해서 여는 국제학술대회다. 그러나 대부분 국제학술대회가 외국 학자들에게 강의를 하게 하고 하루종일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혀놓는 형색이 돼가고 있다.

국제학술대회가 오히려 더 부실해

최진희 서울시립대 교수(환경독성학)는 “국제학회일수록 형식적일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한다. 빈곤한 내용을 메우기 위해서 ‘국제’라는 威勢가 필요해진 것이다. 거의 모든 학회들에게 아주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는 이런 국제학술대회의 형식주의에 대해서 점점 많은 불만들이 생겨나고 있다.

강호정 이화여대 교수(생태학)는 “발표를 했을 때 나름의 학설을 갖춘 그 분야 전문가가 3~4명 정도는 앉아 있어야 토론이 될 텐데, 근접한 사람조차 많질 않으니 일반적인 이야기로 흐르게 된다”라고 지적한다. 이는 인력이 부족한 이공계에서 심하게 겪는 문제이지만, 전공분야가 세분화된 인문사회계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무기력한 풍경들에 비한다면 김대성 한국외대 교수(터키학)는 행복한 경우에 속한다. “지정토론자들이 그냥 오는 법이 없고, 꼼꼼하게 자료를 준비해와서 활발하게 토론한다”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이 논문을 쓴 사람보다 많이 안다는 식으로 ‘논문이라고 썼냐’, ‘시대착오적인 견해다’라고 윽박질러서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잘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봉영 항공대 교수(국문학)는 반대의 견해다. “과연 몇 명이나 자신의 그물을 짜가지고 와서 발표를 하는 걸까”라며 논문의 비주체성과 서구종속성 때문에 느끼는 학술대회에 대한 환멸감을 전한다. 최 교수는 “시비를 걸려면 끝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용도 없는 공허한 외국이론을 들고 갑론을박을 해봤자 느는 것은 싸움실력 뿐이라는 것.

오늘도 많은 교수들이 “학회에 가기 위해 운전중이다”, “학회발표장인데 좀 있다가 통화하자”라며 매우 바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시인 이성복의 말처럼, 삶과 학문의 ‘탈 것’으로 굳건히 서있지 못하는 이 수많은 학술대회들의 전람회가 1학기 종강을 앞두고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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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2005-07-25 18:49:49
그렇습니다. 학회에서 논문의 발표보다는 다른 행사들이 중요하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지요. 학회장 선거나 협찬를 위한 시간배분 등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 학술발표는 정말로 짮게 주어지지요. 특히 마지막 발표의 경우, 준비한 것이 허망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농을 하는 발표자들도 있지요. 또한 잔일 세부 전공분야의 학회에서 여러 분과로 나누어서 동시에 실시를 하니. 정말로 듣고 싶었던 논문의 발표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아주 많지요. 이건 학술발표와 토론을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냥 개최했다. 몇 편이 발표되었다. 등이 중요한 거 같이 보이지요. 또 이에 한번 이름 올렸다는 발표자도 등장하고요. 이러한 일들은 교수평가를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기도하고요. 학회도 마찬가지지만.
이일과는 별개입니다만, 학술진흥재단에서 실시하는 등재학술지의 경우 짭은 기간에 매년 너무 많은 학술지가 등재지 및 등재후보지로 지정되어, 어떤 전공분야는 거의 모든 학술지가 등재후보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많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지요. 이런 일들은 없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