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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다른 삶을 꿈꾸다
영화로 다른 삶을 꿈꾸다
  • 심광현
  • 승인 2021.10.22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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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 심광현, 유진화 지음 | 희망읽기 | 338쪽

서구 최신 이론 경쟁적으로 수입해 브랜드화
이제는 한국사회와 대중의 변화를 돌아볼 때

신작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는 전작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2020)에서 제기한 ‘역사지리 인지생태학적 형식지와 대중의 암묵지의 순환’이라는 과제를 다음과 같이 풀었다. “현실의 모순→영화적 변형→관객 마음의 변화→현실의 변화→ ...”로 이어지는 ‘삼중 미메시스’의 순환 과정을 해명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사회 변화와 관객의 소원-꿈의 상호작용을 ‘괄호’ 치고, 오직 영화와 영화이론의 역사 해석에 집중해온 ‘씨네필적인’ 영화이론서와는 결이 다르다.    

여기서도 영화의 특수한 역사, 영화철학, SF영화, 메타버스 시대의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 등을 전문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영화를 의식의 구대륙과 무의식의 신대륙을 연결하는 제3의 항로로 보고, 정신분석(제1 항로)과 뇌인지과학(제2 항로)을 연결해 ‘꿈(밤)-뇌(낮)-영화(가상)의 이야기’의 인지생태학적 회로를 다이어그램으로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자평한다. 이 회로로 보면 오늘날 대중영화는 “이미 발견된 비판적 형태의 진리”를 가장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화하면서, 묻혀 있던 삶의 진실이 “지적, 도덕적 질서”로 자리 잡는 데 의식적-무의식적 영향을 미치는 대중의 철학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46~53쪽). 

특히 영화를 통한 비판적 진실의 사회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2003년에서 2019년까지 19편의 한국 천만 이상 관객 영화에 초점을 맞췄다. 이 기간 총 27편 천만 영화 중 할리우드 영화는 8편에 불과했다. 언론과 평론가들은 천만 영화가 나올 때마다 흥행 기록 경신에 주목하거나 스크린 독과점을 문제 삼은 데 반해 유례없는 천만 영화 현상 자체의 문화정치적인 의미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람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행기의 역사적 블록 형성에 기여할 엄청난 ‘철학적 사건(53쪽)’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면 모든 언론과 평론가들은 「기생충」과 「미나리」의 아카데미 연속 입성에 환호하며 감독·배우의 예술성을 극찬했다. 

 

천만 영화가 지닌 문화정치적 의미

이 양극화된 평가는 천만 영화를 선택한 한국 대중의 의식적-무의식적 지향이 아래로부터 한국 사회 변화에 미친 영향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봉쇄해 왔다. ‘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런 철학적 무지는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지난 70년 동안 평균 7년 단위로 솟구쳤던 전국적 규모의 대중 시위가 어떻게 한국 정치의 퇴행을 극복하는 진보적 지렛대 역할을 해왔는지, 이를 통한 전례 없는 정치적 압축성장의 함의를 함께 읽어내지 못하는 것과도 상응한다. 

등잔 밑이 어두운 이런 현상은 그동안 지식 수용·생산에 스며든 사대주의나 옥시덴탈리즘과도 무관치 않다.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한국의 지식인-전문가들은 대부분 서구의 최신 이론을 경쟁적으로 수입해 각자의 지적 브랜드로 삼는 일에 몰두했을 뿐 한국 사회와 대중들이 어떻게 빠르게 변화하는지를 깊이 천착하지 않았다. 이론과 실천 간의 이 괴리는 한국의 대중영화·대중문화가 급성장해 세계화된 데 반해 이에 대한 연구는 크게 못 미치는 이론적 지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필자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가 경제적-정치적-문화적으로 해외 사례를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서 누적된 사회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발명해야 할 새 지평에 도달했음을 살폈다. 더불어 역사와 현실의 모순을 치열하게 파고든 천만 영화에 대한 대중의 적극적 선택 속에, 나와 세상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진솔한 해결책이 암묵적으로 누적되어 왔음을 밝혔다. 

이어 그에 담긴 진보적 가치 지향을 역사지리-인지생태학의 프레임으로 명시화했다. 오토포이에시스의 예속에서 자유로, 어포던스의 불평등에서 평등한 향유로, 차별과 경쟁에서 협력과 연대의 미메시스로의 전환의 오랜 꿈을, 다중-지능과 다중-정체성을 지닌 다중-프랙탈 구조의 새로운 대중의 형성으로 실현하기가 그것이다.

 

차별과 경쟁에서 협력과 연대의 미메시스로의 전환

벤야민이 말했듯이 “유동하는 대중의 품 안에서 계급이 형성되는” 방식의 다중-프랙탈 구조의 대중 형성의 예비적 형태를 ‘천만 영화 현상’에서 볼 수 있다. 가령, “공포와 희망의 양가감정을 정확하게 재현한 영화 「명량」이야말로 유동적인 대중 속에서 경쟁하는 여러 계급들 간의 헤게모니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왕과 사대부 귀족 계급의 헤게모니가 붕괴되는 가운데 백의종군하는 장수와 병사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긴밀한 협력과 연대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184쪽). 이런 방식으로 ‘천만 관객’이 선택한 대중영화들은 “있는 것에만 매몰된 제도정치와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주장하는 대중정치 사이의 넓은 간격을 무의식적으로 매개하는 <심리적 광장>”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168쪽).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개봉한 「명량」 이래 가속화된 ‘천만 영화 현상’은 2016~17년 촛불과 광장의 정치를 촉매하면서 201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한국의 대중이 대중영화와 대중정치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이행기의 도래를 암묵적으로 감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천만 영화가 「명량」 이후 가속화 했다. 이미지=빅스톤픽쳐스

하지만 아직도 지식인-평론가들의 인식은 대부분 문명 전환에 대한 대중의 적극적 열망에 못 미치는 것 같다. 협소한 정치적 현실주의 또는 냉소적 관념론에 자폐되거나 사변적 형이상학에 들떠 있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 테제 11번을 차용하면, ‘그동안 한국의 인문학/사회과학은 서구 이론의 수입과 해설에만 매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대중영화/대중문화를 매개로 자기와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형시키려는 대중의 소원-꿈의 철학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해 대중과 함께 현실을 변화시키는 일에 나서는 것이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천만 영화 현상’의 동력이었던 집단적 극장 관람 형식이 OTT 서비스를 통한 개인 관람 형식으로 바뀌면서 대중영화 역시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과거의 올바른 선택>에 내재한 암묵적인 가치 평가의 내용을 명시적(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지식으로 재구성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현재의 선택>의 준칙으로” 바로 세운다면, 메타버스-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 따라 “향후 영화의 관람 형식과 매체와 표현 양식이 크게 변하더라도 나와 세상의 바람직한 변화를 매개하는 영화적 미메시스의 순환은 활발하게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크라카우어의 말처럼 영화의 내용을 결정하는 최종 심급은 관객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이를 위한 생산적인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결론 326~327쪽).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미학/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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