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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21] 이분법의 시대
[한민의 문화등반 21] 이분법의 시대
  • 한민
  • 승인 2021.10.14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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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21

 

한민 문화심리학자

인터넷 댓글을 살펴보는 것은 나의 중요한 일과이자 연구다. 사람들의 댓글에서는 설문지나 실험으로는 찾아낼 수 없는 생생한 반응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인터넷은 전쟁터 그 자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슈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다.

문제는 이 싸움이 단순한 주장이나 논쟁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일단 편이 갈리게 되면 사람들은 상대를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 것처럼 매도한다. 이들이 상대방에게 퍼붓는 온갖 혐오의 언어들은, 말하자면 너와 같은 세상에서 살기 싫다는 얘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기원한다. 기억이 닿는 한 한국인들에게 선택지는 항상 둘이었다. 일제강점기, 사람들은 독립 아니면 친일을 선택해야 했고,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이냐 김일성이냐가 생사를 가르는 질문이었다.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시스템과 문화적 가치가 사라진 현실에서 한국인들은 생존을 보장하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데 익숙해졌다. 

공산주의자, 빨갱이, 종북이라는 낙인은 극히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주변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죽거나 장애를 입거나 모든 사회적 지위를 잃고 평생을 감시당하며 폐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인들에게 이분법적 사고를 내재화하게 만들었다. 이분법적 사고란  흑백논리를 말한다. 흑백의 세계에는 제3의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우리편 아니면 적, 선 아니면 악으로 판명 나는 세계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선이라면 다른 쪽은 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악으로 규정된 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 자신을 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악을 향해 저지르는 모든 일들은 정당화시킬 수 있다.

이분법적 논리는 상대를 공존의 주체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한국사회의 오래된 병폐인 타협의 부재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오랜 시간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남과 북처럼 계층과 계층, 지역과 지역, 세대와 세대, 아래층과 위층, 남과 여 등 우리는 편이 나뉘는 순간 서로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적으로 인식해 버린다. 그 다음에는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상대를 모두 없애버리거나 상대가 없는 것처럼 서로 등 돌리고 지내는 것뿐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어느새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자 문화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대는 다양성의 시대다. 세계화, 다문화, 남북 교류와 협력 등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갈등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 시점에 상대를 공존의 주체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이분법적 사고는 어떤 면으로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무조건적인 이해와 포용이 우리의 이익을 보장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해결해나가면 된다. 이분법적 사고는 상대와 머리 맞대고 앉을 기회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분법적 사고의 부작용 중 하나는 그것이 행복을 느끼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행복은 증오와 경멸보다는 포용과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다. 누가 됐든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지 못해 안달인 마음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의 행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분법적 사고는 자신의 경험조차 행복 아니면 불행이라는 구도로 받아들이게 한다. 여기에는 행복에 대한 오해들도 한몫을 한다. 행복은 고통과 괴로움이 전혀 없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상태이며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이들은 내가 지금 즐겁지 않으니 고로 나는 불행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이 실제로는 전혀 이분법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보다는 한참 늙었지만 노인들보다는 한참 어리다. 나와 아내는 남자와 여자지만 부부라는 단위로 살며 윗집 사람들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키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냥 거기 있다. 세상을 진보 vs 보수, 청년 vs 노인, 남 vs 여, 아랫집 vs 윗집으로 가르는 것은 결국 현상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우리에게는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습관이 있고 그것이 거의 아무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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