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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불가한 지식을 정합적으로 묶는것
환원불가한 지식을 정합적으로 묶는것
  • 이봉재 서울산업대
  • 승인 2005.06.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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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산책: 『통섭』(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刊, 560쪽)

이봉재 / 서울산업대·철학

에드워드 윌슨의 저술은 언제나 특별하다. 철저히 과학적이면서도 열정적이며 도전적이다. 1998년 처음 출간된 이 책 ‘통섭consilience’도 마찬가지다. 과학적 엄밀성의 수준을 잃지 않으면서도 지식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더 이상 인상적인 스타일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통섭’은 일차적으로 과학에 대한 ‘돌아온’ 예찬이다. 그 남용과 오용의 우려로 인해 경계의 대상으로 전락한 21세기 과학에 대해, 그것은 여전히 위대한 물음이며 그에 대한 용감하고도 인내 가득한 탐구라고 윌슨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과학이라는 지적 모험에 대한 설득력있는 예찬으로서의 ‘통섭’은 브로노프스키의 ‘인간등정의 발자취’에 비견할 만하다.

‘통섭’은 또한 도전적이다. 이 책에서 윌슨은 과학에 대한 세련된 21세기적 통념들, 과학은 더 이상 객관적 진리의 추구일 수 없다는 주장을 정면에서 논박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말하듯 우리는 더 이상 객관적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가. 윌슨에 따르면 절대 그렇지 않다. 과학에는 물론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종적 주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거들이 계속 쌓이고 이론들이 더 단단하게 서로 얽히면서 보편적인 인증을 받은 지식들”(122쪽)은 존재한다. 그것들이 객관적 지식이며 또는 객관적 지식을 위한 주춧돌들이다.

역설적일지 몰라도, 과학은 왜 우리에게 객관적 지식이 불가능한지 또는 그토록 어려운지조차 설명해낸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윌슨이 말하듯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미숙하기 짝이 없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불일치를 진단하고 교정하는 것이 과학이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욕구를 금지당할 때 과학은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임무와 추진력을 잃어버린다. 

‘전문화’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오늘날 과학은 전문화되어있다. 토마스 쿤이 말했듯 오직 전문화를 통해서만 우리가 아는 과학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윌슨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진정한 과학은 전문화를 성취하되 그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전문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지식을 통합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서구지식을 태동시켰던 본래적 야망이며,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주장의 신빙성에 대한 최종적 테스트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113쪽) 과학적 주장은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통섭”이다.

이 책이 제목으로 삼고 있는 통섭은 19세기 초반 활동했던 과학철학자 윌리엄 휴월(William Whewell)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휴월에 따르면 두개 이상의 일반화를 보다 포괄적인 이론으로 통합하는 것은 이론의 신빙성에 대한 중요한 근거이며, 그를 “귀납의 통섭” 이라 이름한다. 천체궤도에 대한 케플러의 법칙과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법칙 등을 하나의 운동이론으로 통합해낸 뉴턴의 업적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윌슨에게 통섭은 더 큰 야망, 지식의 통일을 위한 수단이다. 모든 지식의 지식됨은 통섭에 의해 테스트 되어야 하며, 이 점에서 인문학, 사회과학도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윌슨이 말하는 통섭이란 정합성의 일종이며 환원과는 다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 윌슨 역시 지식들 간의 환원, 예컨대 생물학과 물리학, 사회과학과 생물학 간의 환원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질에서 생명으로 전이하는 순간 물리적 속성들로부터는 예측불가능한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석의 수준을 따라 분리되는 환원불가능한 지식들을 상호간 정합적인 것으로 묶어내는 것이 통섭이다. 두 수준의 지식들, 법칙들이 모순적이지 않으면서 인과적 연관관계를 회복하는 것, 그것이 통섭이다.

그렇다면 환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통섭의 부분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들로 분해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복잡한 수준의 것과 단순한 수준의 것들을 가로지르는 이해방식이자 연결의 일종이니 말이다. 환원은 복잡성을 탐구하기 위한 드물게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여전히 중요하다.

假說, 그러나 가능한 사유공간

이 책의 가장 논란 많을 메시지는 통섭의 확장된 차원, 즉 자연과학과 자연과학 아닌 것 간의 통섭에 있다. 윌슨에 따르면 더 이상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은 분리될 필요가 없다. 그 분리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생명과 문화 사이에는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인공물의 세계, 문화의 세계가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공물은 물리적인 것을 가지고 만들어지지만, 지성을 통해 디자인됨으로써 물리적인 것 이상의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졌다. 현대의 생물학과 의학이 인간의 뇌와 유전적 본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지성을 이해하기 시작함으로써, 과학과 문화-인문학 간의 통섭은 수행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었다는 것이다.

7~11장을 통해 사회과학, 예술, 윤리 등의 영역에 대한 통섭 테스트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흥미진진하게 제안되고 있는데, 거기서 윌슨의 무기는 후성규칙(epigenic rule)이며 그를 통해 유전자-문화(gene-culture)의 공진화 모델이라는 작업가설을 설명하고 있다. 진화사를 통해 유전자에 장착된 감각지각과 정신발달의 어떤 규칙성의 유형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우리의 행동과 학습을 편향적으로 인도하며, 궁극적으로는 문화라는 인공의 시나리오의 생존마저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윌슨의 주장과 제안들은 철저히 과학의 정신에 서있다. 시험하고 수정해가야 할 가설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들 역시 일단은 하나의 흥미롭고 생산성 풍부한 이론적 제안일 뿐이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검토될 수 있을 뿐인데, 그러나 철학자에게 윌슨의 책을 어떤 것일까. 철학의 관점에서 윌슨 책의 특별한 중요성은 인간본성이라는 잊혀진 주제를 다시 소환해주는 데 있다. 20세기 사회주의 실험의 대역사 속에서 인간본성이란 개념은 반동적이며 비이성적인 우파 프로그램을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회를 통해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확신과 함께 종족적 차별에 대한 혐오로 무장된 20세기는 인간본성이란 주제를 사상사로부터 삭제시켰다. 윌슨은 바로 이 지점에 있어서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윌슨을 통해 우리는 지난 세기의 이성주의/보수주의라는 낡은 대립틀 바깥에서 그 주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인간본성에 대해 과학적 엄밀함의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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