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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연구개발혁신법’, 이대로 좋은가?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이대로 좋은가?
  • 이중원
  • 승인 2021.10.0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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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이중원 논설위원 /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

 

이중원 논설위원(서울시립대)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하 혁신법)은 2020년에 제정돼 202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혁신법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던 연구개발에 관한 복잡한 규정을 일원화하고 연구지원 시스템을 통합함으로써, 업무를 간소화하고 행정부담을 경감하는 등 연구현장 중심의 제도를 개선하여 연구의 자율성을 제고할 목적으로 제정됐다.

하지만 혁신법은 그 중요한 취지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분야에 해당되는 내용을 성격이 다른 인문사회 분야에 무리하게 확대 적용함으로써, 오히려 인문사회 연구의 자율성을 저해하고 행정부담과 책임을 가중시키며 연구자에 대한 제재조치의 강화로 연구가 위축되는 우려를 낳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행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특히 인문사회 분야로부터 법의 개정에 대한 요구가 매우 뜨겁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혁신법은 인문사회 분야에서 볼 때 제정 목적의 정당성이 취약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연구는 ‘개발’을 연구의 주된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인문학의 연구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다움의 가치, 인간이 만들어 낸 사상과 문화, 이에 바탕 한 인간의 삶 자체와 같은 인간 본연의 근본 문제를 다룬다. 때로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창의적이고 통섭적이며 추상적인 방식으로 비유와 상징 등을 활용하여 주로 사변적으로 탐구한다.

사회과학은 경험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과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주로 다룬다. 특히 사회 현상을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경험적인 이론에 관심이 많고,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가치관의 문제에도 관심이 높다. 이렇듯 연구의 목적·내용·방법 등에서 과학기술 분야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이 차이를 무시한 채 일률적으로 과학기술 분야에 적용돼 오던 사업관리 시스템을 모든 학문분야로 확대하는 것은, 학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학문의 ‘획일화’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다음으로 혁신법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에 잘 적용되는 개념 및 용어들-연구개발, 연구노트, 연구수당 등-이나 평가 항목 및 기준을 표준으로 규정하고, 이를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연구에 그대로 또는 우회하여 일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사회 분야는 교육부의 학술지원과 학술진흥법에 근거하여 학문 특성에 맞는 연구지원 및 관리 시스템을 이미 합리적으로 잘 구축하여 운영해 왔다.

그럼에도 혁신법은 2022년부터 인문사회 분야 역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만들고 있는 연구과제통합관리시스템(IRIS)의 사용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통합관리시스템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에 적합지 않은 항목은 포함하고 정작 필요한 항목은 반영하지 못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인문사회 분야의 ‘학술연구’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개발’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정하고, 혁신법은 과학기술 분야에만 그리고 인문사회 분야에는 학술진흥법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정하는 것이다. 이는 혁신법 제정의 취지를 살리고 동시에 학문별 특성과 자율성도 존중함으로써,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분야의 균형 발전을 이끌어 가는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21세기의 과학기술문명은 인류 사회에 엄청난 문명의 이기를 가져다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삶의 양식은 물론이고 인간이 인간·사회·자연과 맺는 관계들, 심지어 인간의 정체성까지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인류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이를 받쳐 줄 과학기술의 책임 있는 발전을 위해서, 인문사회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와 함께 발전해야 하는 상생 동반자라는 생각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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