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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냉전과 팬데믹
포스트 냉전과 팬데믹
  • 이지원
  • 승인 2021.09.30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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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희, 와카바야시 치요 지음 | 소명출판 | 202쪽

2020년 공론장과 학문적 논의를 지배한 것은 온통 코로나 관련 의제였다. 팬데믹 상황 속 현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 대안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토론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대 세계의 기본적 구성 원리들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구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팬데믹 시대의 담론시장에서 의제를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북미와 서유럽 나라들이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방편의 하나로 아시아 석학 초청 웨비나 시리즈를 기획하여, 팬데믹에 대한 아시아적 경험, 아시아적 관점, 아시아적 이해를 모색하려 했다.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총서 시리즈는 아시아 권역 내 트랜스로컬한 학문적 교류와 연대를 활성화하고, 우리 시대 긴급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포스트지구화와 아시아의 정동 정치’라는 아젠다를 내세운 동아시아연구소는 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일본 본토가 아닌 오키나와의 사례에 주목하였다. 중앙정부의 움직임에서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장 멀리에 위치한 오키나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팬데믹 경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한층 넓혀줄 것이라 생각했다.

오키나와 사회는 경제적 취약성에 더해 미군의 군사훈련에 의한 소음, 추락사고, 성폭력, 범죄사건, 토양 및 공기오염 등에 노출되고 있다. 이 속에서 특히 여성과 청년, 아이와 노인들은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가혹한 현실로 내몰리고 있다. 보건, 환경, 평화, 경제, 돌봄에 이르는 총체적 위기상황은 팬데믹 시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오키나와의 위기는 너무나 집약적이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일본 방위성은 헤노코 지역의 신기지 공사를 멈추지 않았고, 그로 인해 주민들의 기지반대운동은 지속과 정지 사이에서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미군기지 내 집단감염과 아베 정부의 ‘Go To 트러블’ 캠페인으로 2020년 여름 오키나와의 감염자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신 기지공사의 비용을 코로나 대책에 사용하라!”는 오키나와 시민의 절실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이 현실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팬데믹은 만성적인 불안의 정동을 삶의 일부에 장착시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사람들의 아비투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는 모두가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모두가 나와 같은 불안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느끼고 있다. 이 전환을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아닌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지평을 열고 삶의 조건을 재조직화할 계기로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아시아의 팬데믹 경험을 듣는 작업은 사회적 연대가 원래 쉽지 않고, 잘 드러나지도 않는 지속적 실천의 결과라는 점을 다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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