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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20] 소확행 다시보기
[한민의 문화등반 20] 소확행 다시보기
  • 한민
  • 승인 2021.09.28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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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등반 20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소확행이란 말이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다. 1990년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 『랑게르한스섬에서의 오후에서 처음 쓴 말이다. 이후 서울대 소비트렌드연구소가 펴낸 『트렌드코리아 2018』에서 '2018년 우리 사회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선정하면서 여기저기서 이 말을 쓰게 되었다. 

나는 소확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큰 행복은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려서다. 그리고 소확행이 쓰이는 맥락이 실제로 그렇다. 뼈빠지게 몇 년씩 공부하고 스펙 쌓아봤자 돌아오는 건 쥐꼬리만한 월급 뿐인데 언제 돈모으고 집 사고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울거야. 포기해. 포기하고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작은 행복에 만족해. 내가 받아들이는 소확행의 의미다. 

큰 행복은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집 사고 결혼하고 애 낳는 것이 왜 큰 행복인가? 부모 세대들은 당연히 하는 줄 알았던 그런 일들이 왜 어떤 이들에게는 가져서는 꿈이 돼버린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소확행이 개인주의적 가치에 익숙한 젊은이들이 집이나 결혼, 출산 같은 전통적 가치보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소리를 늘어놓던데, 그들이 삼포세대라는 말의 뜻이나 알까 싶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에서 보자면, 안전욕구(집)와 소속 및 애정의 욕구(결혼)는 배고픔만 충족되면 예외없이 드러나는 결핍욕구다. 상위단계의 욕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먹고 살 일조차 해결되지 않은 청년들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서 개인주의 가치 타령이라니. 그 좋아하는 개인주의적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 생각조차 안 해본 분들임에 틀림없다. 

개인주의 vs 집단주의 개념을 정교화한 심리학자 트리안디스는 개인주의적 가치와 경제적 여유의 관련성을 주장한다. 사람들은 개인의 생존을 더 이상 집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때 개인의 욕망과 지향을 추구하려 한다. 독립할 돈이 없어서 부모와 같이 사는 판에 그 무슨 개인적 지향을 추구하겠다고 소확행을 누리겠는가.

욜로니 탕진잼이니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번 뿐인 인생 즐기다 가자는 식이나 어차피 벌어봐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모아서 써 없애자는 문화가 무엇이 바람직하다고 트렌드니 뭐니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소확행은 결국 ‘대충 살아라’가 되고, ‘목표를 갖지도 노력하지도 마라’가 된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같은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의 청년들이 현재의 삶에 지쳐있다는 말도 되겠지만, 어른이란 사람들이 청년들에게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 뿐더러, 그걸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더욱 나쁘다. 

살면서 꼭 해야 하는 포기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누군가는 힘들지 않고 충족했던 것들마저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건 무책임하고 비열한 짓이다. 소확행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나날에 잠시의 활력소가 되면 충분하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상의 행복에 만족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목적에서 나온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살아야 할 이유를 준다. 

몽테뉴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인간은 목적을 갖고 사는 자라고 하였다. 모두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 될 수도 없고 되지 못한다고 압박을 받을 필요도 없다. 몽테뉴가 말하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인간은 역사적 위인이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목적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목표를 정하는 것은 현재를 즐겁게 만든다. 스스로 목표를 선택하고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통제감의 욕구를 충족하고 만족감을 경험한다. 이것이 삶의 의미다. 의미는 긍정적 정서와 함께 행복의 구성요소 중 하나다. 긍정적 정서는 충분히 느끼지만 의미없는 삶은 예를 들면, 마약중독자와 같다. 행복해지기 위해 긍정적 정서가 중요하다면 마약을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를 말하지 않는 소확행은 마약과 같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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