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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엔 장진구... 2021년은 '불안정 직장인'
2000년엔 장진구... 2021년은 '불안정 직장인'
  • 천정환
  • 승인 2021.09.14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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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미국드라마 'the CHAIR' 시즌1을 보고

교수의 직업윤리와 그에 따른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과잉 순응하며 목소리 못 내는 한국의 교수는 '불안정 직장인'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에서 학과장이 된 주인공은 대학의 다양한 이해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주권을 갖고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써 정체성을 갖춰나간다. 천정환 교수는 이러한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교수됨'이라고 분석하며 한국 교수사회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에서 학과장이 된 주인공은 대학의 다양한 이해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주권을 갖고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써 정체성을 갖춰나간다. 천정환 교수는 이러한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교수됨'이라고 분석하며 한국 교수사회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어’가 교수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2000년 <MBC> 아침드라마 ‘아줌마’에서 극중 장진구 교수가 주인공으로 화제가 된 이후, 2021년 세계화·기업화된 대학의 교수사회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미국 대학의 인문계 교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가 국내 교수사회에서 어떤 시사점을 던질까.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과.사진)가 페이스북에 ‘더 체어’ 감상문을 올렸다. 천 교수의 이야기를 더 들어봤다. 

천 교수는 “과잉 충성하며 미리 벌벌 떠는 ‘불안정 직장인’이 오늘날 한국 교수 공통의 표상”이라고 적었다. 한국 교수사회에서 ‘교수됨’을 구현할 “정신적·물리적 조건 자체가 급격히 고갈되고 있”는 배경에는 “‘전임’이라는 말에 마법을 부린 한국식 ‘대학 미라클’과 이를 방조한 교육부 공동 창작 판타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아래는 천 교수의 기고글 전문.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인문계 대학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시청자들은 이 ‘미드’가 재밌을  것이다. 한국계 산드라오 등 배우들의 호연이나 서사의 재미와 별도로, 이야기가 도무지 ‘남의 일’이 아니게 절절하고도 ‘웃프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크게 보면 인문학의 위기, 테뉴어 제도와 대학서열, 소수인종과 여성의 권리 등 한국 신자유주의 대학체제와 미국의 그것 사이의 비슷한 점들은 물론, 미시적으로는 ‘교수’란 인간들의 행태 또한 그렇다. 시리즈1의 남자 주연격인 ‘빌 돕슨’과 그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인 학장을 보면서, 한국 대학에 실존하는 누군가들을 떠올리는 데 1초가 걸리지 않았다. 전자는 한편 아직도 유치한 낭만적 문청처럼 행동하고 자기연민에 빠져있으면서도 실상은 기득권을 다 누리는 자유주의-모더니스트-중년 남자고, 후자는 자기도 교수면서 동료나 후배 연구자들의 권리와 위엄을 허물고 대학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데 앞장 선 어떤 보직교수다. 그런 자들이 함께 ‘인문대의 위기’를 만들고 또 운영해간다.  

한 학기도 안 돼 펨보로크대학 최초의-여성-학과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김지윤’의 적이면서 ‘Department of English’의 현재를 끌어가는 외력은 두 가지다. 하나는 30년째 똑같은 강의를 한다는 낡은 기득권과 '모비딕 교수님’으로 대표되는 (근대)인문학 체제. 다른 하나는 학장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가 밀고 문명의 변화가 만드는 새로운 대학체제다. 물론 둘 다 주로 남성권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 주변에 새로운 시대의 학생들과 강력하지만 아직은 유동상태에 있는 페미니즘, 소수자권리 등의 새로운 아카데미의 규범이 작용하고 있다. 

소수인종-여성-연구자인 지윤킴과 오래된 백인남성 권력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간명하다. 그녀는 그들에게 저항하거나 (또는 인정받기 위해) 온힘으로 삶을 버티며 공부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과의 관계는 모호하다. 그녀는 대학 행정 최전선의 실무자인 학과장으로서 대학 신자유주의의 스스로 파괴적인 새 조류에 순응하거나 또는 그것을 타인들에게 적용해야만 한다. 당연히 딜레마에 빠진다. 아마도 한국 대학의 수많은 (그래도 양심 있는)학장, 학과장들이 오늘도 그러하듯.   
그런 와중에 필자가 보기에 시즌 1의 주제라 할 만한 것이 제시된다. ‘교수됨’, ‘교수-되기’이며 그래서 이야기는 ‘교수-지윤킴’의 성장서사가 된다. ‘나’는 온전히 ‘나’여야 하고, ‘나’인 연구자며 교수여야 한다. 그 존재는 단지 ‘소수 인종-여성 연구자’나 박사를 잘 마친 젊은 연구자(=나이 든 학생)가 아니라, 위엄과 학덕을 가진 교육자이며 그야말로 ‘자리(CHAIR)’에 제대로 앉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런 연구자이며 선생인 ‘나-교수’는 온전히 독립된 존재이기에 총장이든 학생이든 아부하거나 순응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것이 정교수, 즉 종신재직권(테뉴어)이자 체어니라…. 뭐 이런 이야기 같다. 

 

말하지 않는 교수-됨

내 경험지평이 좁은 탓인지 몰라도 한국 교수들은 ‘교수됨’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지 않는 듯하다. 누군가들의 도움과 이른바 ‘교풍(또는 학맥?)’과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개별적인 성취를 통해 이루어지는 임용으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달라지는 연구자-교수로서의 자격, 위상, 그리고 연구자이자 선생으로서 (해야)할 일에 대해 말이다. ‘원로’나 선배들에게 단편적인 것을 듣고 배우거나 어설피 따라하며 나이 들어갈 뿐이다.(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에 대해 직설적으로 후배ㆍ동료들과 묻고 말하고 싶다.) 

필요한 대화와 토론이 삭제되는 대신, M.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그 더러움을 이겨야 한다’ 했던 정말 졸렬하고 치사한 이야기들, 즉 이번에도 별 볼일 없는 누가(주로 서울대나 아이비리그) 임용심사에서 어떻게 됐더라, 어디 출신이 어느 출신과 경쟁했더라 같은 이야기라든가, 어떤 교수가 바보짓이나 비리를 저질렀다는 ‘뒷담화’와 교무처(장)의 간교한 방침들이 압도할 뿐이다. 

교수의 직업윤리와 그에 따른 삶의 조건이 무엇이며 그 내면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과 성찰은 왜, 언제, 어떻게 다 사라졌을까? 그래서 나는 좀 갈구해왔었던 거 같다. ‘교수됨’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 북돋워줄 동료를. 그리고 이 ‘폭망’한 인문사회과학 대학에서 교수로 나이 들고 ‘제자’라는 존재를 두는 문제를 진심으로 조언해줄 선배를. 그래서 교수단체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매일 본부와 교무처가 날 어떻게 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논문 편수가 모자라지 않을까. 과잉 순응하고 과잉 충성하여 미리 벌벌 떠는 ‘불안정 직장인’이 오늘날 한국 교수 공통의 표상이다. 심지어 정년트랙의 부교수ㆍ교수들도 재단과 보직들 앞에서 설설 긴다. 오늘날 대학 거버넌스의 성공(?)요인은 무엇보다 대학 권력자들이 그들이 가진 실제 위력보다 훨씬 더 무섭고 크게, 마치 먹잇감 앞에서 몸을 부풀리는 포식동물처럼 보이게 만든 데 있다. 그래서 결국 (일부) 교수들은 ‘나’가 되는 대신에 연구자 명목의 자족적 오타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왕자와 공주님, 또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꼰대’로서의 삶으로 자족하고 도피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작지 않은 기득권도 있다. 

 

불가능한 ‘체어’ 

그래서 <체어>의 주제는 오늘날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온전한 ‘나-연구자-교육자’인 ‘교수’는 어디 있나? 그런 존재일 수 있는 정신적ㆍ물질적 조건 자체가 급격히 고갈되고 있다. 물론 운 좋게 연구자-교육자로서의 권리와 자존심을 유지하는 정규직 정년 보장 교수들도 많이 있다. 주로 우리 같은 1970~80학번 남자들, 수도권, 국공립대, 50대 이상들이다. 개인적 아픔이 있든, 낭만주의적 문청이었건, 사실 그런 한국의 ‘빌’들에게는 꽤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있고 그 때문에 할 일이 많다. 

며칠 전 서울의 모 사립대에 근무하는 교수가 말해주기를, 대학들에게는 연봉 2~4천만 원을 받으며 주당 열 몇 시간 수업을 하고 논문도 3~5편씩 쓰는 ‘정규직’ ‘비정년’ ‘전임’ 교원 임용이 너무나 수지맞는 장사다. 그 ‘전임’ ‘교수’들은 최악의 착취 환경에서 빨리 벗어나 조금이라도 나은 데 재취업하기 위해서라도 논문을 더 빨리 많이 쓰고자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산하는 논문은 오롯이 대학의 ‘지표’가 된다. 처우가 좋으면 눌러앉고 싶고 나이 들거나 정년보장을 받으면 분명히 실적이 저하되니 계약기간 중에 젊은 그들을 최대한 ‘빨아먹어야’ 한다. 대학이 나서서 굳이 안 잘라도 그들이 연구도 수업도 많이 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중도에 나가면 대학에는 외려 큰 이득이다. 일석오조다. 

과연 통계상 ‘정규직’ ‘전임’ 교수가 엄청나게 빨리 늘어나고 있으며 교수 1인당 학생 수도 줄어들고 있다 한다. 이는 ‘정규직’ ‘전임’이라는 말에 마법을 부린 한국식 ‘대학 미라클’과 이를 방조한 교육부 공동 창작 판타지다. ‘강의’, ‘연구’, ‘산학협력’, ‘외국인’ 등의 각종 수식어가 붙은 ‘전임’ ‘정규직’ 교원이 많아질수록, 강사와 전체 교수직의 위상은 하락한다. 강사법 3년차를 맞는 2022년이 되면 얼마나 많은 연구자들이 강의 자리를 잃을지.    

 
요컨대 한국계-이민자-여성-정규직 교수의 성장 스토리인 미국 드라마가 재밌게(?) 수용되는 것은 슬픈 일이고 독한 아이러니다. 그래도 아직은 권위와 기품이 있는 제국-글로벌-신자유주의대학체제 중심부의 ‘사립 학원물’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젊은 (여성) 연구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어느 젊은 여성 연구교수와 박사수료생이 <더체어>가 하나도 재미없었다고 자신의 SNS에 써두었다. ‘교수 사회’와 ‘Department’에 대한 감정이입도 판타지가 1도 없는 듯했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교수-됨’의 사회문화적, 교육학적 의미가 급하게 바뀌고 있다. 이에 대해 전면적으로 토론해야 하지 않을까.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근대의 책읽기』, 『자살론』, 『대중지성의 시대』, 『촛불 이후, K-민주주의와 문화정치』, 『1970, 박정희 모더니즘』(공저) 등의 책을 썼다. 민교협, 지식공유연대, 인문학협동조합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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