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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_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
학이사_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
  • 박경태 성공회대
  • 승인 2005.05.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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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을 때 선배들이 무슨 공부를 하고 왔느냐고 물었다. 소수자연구를 했다고 하니 “야, 그딴 거 했다고 하면 취직하기 어렵다”며 이것저것 걸칠 수 있는 분야를 전공했다고 주장하라는 조언을 해줬다. 물론 나는 그 조언에 충실하게 따랐고 그 결과 취직을 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요즘은 소수자연구를 한다고 하면 참 좋은 것을 한다는 둥, 어떻게 그런 것을 일찍이 공부할 혜안을 가졌었냐는 둥의 얘기를 듣는다. 정말 사람 팔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이쪽 분야에는 아직 전공을 하는 학자가 많지 않으니 어쩌면 내가 곧 ‘뜨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소수자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는 해야 인권을 아는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분위기가 됐고, 중?고등학교 과제물로도 소수자 인권에 관한 것이 드물지 않게 나올 정도가 됐다. 이렇게 된 배경은 한국 사람들이 갑자기 착해지거나 친절해져서라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숙해져서 (또는 먹고 살만해서) ‘남’의 인권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생겨서 그런 것으로 봐야한다. 게다가 동성애자 연예인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이나 ‘트랜스 젠더’ 하리수 씨의 등장과 같이 대중적 관심을 끄는 사건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불교신자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래저래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는 셈이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나는 소수자들을 ‘학술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내가 속해있던 사회학과에 수십 명의 교수들 중에서 흑인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분의 수업은 이런저런 이유로 듣지 못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백인 교수들의 수업만을 들은 것이다. 사회학과의 강의답게 사회문제를 다룰 때 많은 부분이 인종문제와 연결 됐는데, 그 때 백인 학자들은 흑인이 왜 가난한가를 연구하고 강의해서 먹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열심히 공부하고 세상의 모순을 지적하려는 학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이 정말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데 당시의 그런 생각은 이제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나 자신에게 꽂힌다. 나는 소수자들이 왜 억압받고 있는가를 연구하며 먹고 사는 사람은 아닌가, 소수자들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이 돼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과학에서 연구자는 연구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가치중립적인 위치에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도 한다. 이른바 ‘감정조절’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논문 쓰고 강의하고 또 이런저런 보직을 하다보니 내가 한때 사랑했던 소수자들은 이제 나의 재임용과 승진에 필요한 ‘연구거리’가 돼버렸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의 칼날 앞에서 새우잠 자며 추운 겨울을 날 때 가슴 아파하기 보다는 그걸로 뭘 쓸까 고민했던 것 같다. 화교들이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얘기할 때 이걸 어느 잡지에 투고할까를 저울질 했던 것 같다. 제대로 하는 연구도 없으면서.

물론 연구자와 현장운동가의 역할구분을 운운하며 현재 모습을 합리화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그쪽보다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를 찾아가고 싶다.

박경태 / 성공회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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