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똑같은 사건, 사물, 사람에 대해서 여러 명의 작가들이 주제로 삼아 표현해온 걸 알 수 있다. 변주된 주제들인 셈인데, 이들은 무엇 때문에 되풀이 형상화되어 왔을까. 그리고 그들 사이엔 어떤 신비로운 차이들이 있을까. 이번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시작으로 이런 '차이의 예술'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연재형식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 편집자주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평화를 위한 제스처로 그렸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플루타르크가 전한 것이다. 로마에 남자의 인구는 많지만 여자의 수가 부족하자 이런 불균형을 해결해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로물루스는 이웃나라 부족들을 페스티발에 초대한 후 젊은이들로 하여금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을 유괴하고 강탈하게 했다. 그림의 장면은 여인들이 강탈되어간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이 타티우스의 주도 하에 반격에 나서 대치하는 순간이다.(다비드 163) 당시에는 두 리더가 결투를 벌이는 것이 전투의 관례였으므로 화면 중앙에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대결을 벌이고 있다. 화면 중앙의 헤르실리아가 오른쪽 로물루스와 왼쪽의 타티우스 사이에 뛰어들어 아버지에게 전쟁을 중단할 것을 간청한다.
헤르실리아는 사비니인으로 로마의 로물루스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로나인도 되고 사비니인도 되는 여인들은 적으로 맞서 싸우는 아버지, 오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전투를 중단하라고 호소한다. 헤르실리아는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아버지 타티우스에게 말한다. “아버님이 부모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구해낼 딸들이 더이상 없으며 아버님이 벌을 가해야 할 강탈자 역시 없습니다…아버님은 이제 남편에게서 아내를, 아이들에게서 어미를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덤벼들려다 창을 뒤로 제끼며 물러났고 타티우스 또한 방패를 위로 올리고 칼을 아래로 내리며 머뭇거린다. 뒤에 군인들은 자신들의 헬멧을 벗어 위로 던졌는데 평화를 원하는 제스처다. 로마인과 사비니인들은 서로 껴안고 그후 한 민족이 됐다.
▲푸생 © |
한 개인의 독자성으로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시각예술의 발전을 좌우한 파블로 피카소도 말년인 1962년에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다비드 167)을 그렸다. 그는 반세기 동안 일어난 대부분의 혁명적 변화의 주인공이고, 뛰어난 기초 소묘 능력, 시각적 독창성과 구상 능력은 보편적으로 인정받았다. 피카소는 고전적 전통도 완전히 소화했지만, 생전에 그가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로서의 미술 개념을 강화하고, 형식적·추상적 완성도보다는 역동적인 힘과 활기를 강조한 것이다. 1960년대에 피카소는 대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연작을 제작했는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식사’ 연작을 제작했으며, 들라크루아를 연상시키는 ‘약탈’ 연작, 푸생의 ‘유아 대학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모델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가장 작고 미미한 작품에서조차도 천재성을 집중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피카소 © |
그림에 등장하는 전사들은 다비드의 제자와 친구들이고 중앙의 검은 머리를 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비니 여인의 모델은 다비드의 아이들을 돌보던 아델레다. 그녀는 그림에 모델로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그림에서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다비드는 로마의 주제를 그리스 양식으로 표현했는데 로마 미술보다는 그리스 미술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전사들이 누드로 묘사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했다. 그는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완전한 도덕성을 나타내기 위해 육체적으로 온전한 누드로 상징한 것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했다. 실제에 있어 누드로 전투를 벌이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미학적 설명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미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린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지금까지 그린 것들과는 달리 그는 여인을 중앙에 구성하면서 남자들을 누드로 에로틱하게 묘사했다. 그는 영웅적 누드로 고대의 신·영웅·보편적 남성을 나타내려고 했다.
또한 영국 판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는데 존 플랙스맨이 ‘일리아드’에서 모티프를 얻어 그린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위한 전투’(다비드 168)와 ‘아레스를 향해 창을 던지는 디오메데스’, 그리고 제임스 길레이의 ‘죄, 죽음과 마귀’(다비드 169)를 참조했다.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를 만나 평생 우정을 나눈 존 플랙스맨은 영국 조각가, 제도가, 디자이너로 신고전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고, 제임스 길레이는 당대 영국의 가장 유명한 캐리커처였다.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작품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루브르에 위치한 과거 건축아카데미로 사용된 강당을 빌려 전시한 후 입장료를 받았다. 파리에서는 돈을 받고 작품을 관람하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카데미가 그런 행위를 금해온 터라서 이는 새로운 사건이 됐다. 따라서 입장료를 받는 전시에 대해 비난이 거셌다. 입장료 1프랑 80센팀은 적은 돈이 아니었으므로 전시회는 결국 상류층 인사와 외국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 됐다. 당시 숙련공 일당이 1프랑 미만이었으므로 입장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보기 위한 입장료는 당시 고급 음식물인 버터 450g의 값이었고, 아스파라거스 한 다발 혹은 햄을 700g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 작품은 1799년 12월 21일부터 5년 동안 전시됐고 약 5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다비드는 제자들에게 입장료가 2만 4천 프랑에 이를 때마다 그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했으며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식사를 제공했다. 다비드는 입장료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값에 이르게 되면 작품을 정부에 기증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막상 입장료가 원하는 액수에 이르렀을 때는 악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시회가 계속되던 1801년 10월 그는 파리로부터 남동쪽으로 48km 떨어진 퐁텐블로 근처 오조우에 르 불지에 별장을 구입했다. 이 전시회는 개인전의 효시가 됐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