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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남편 만들기, 1564년 백씨 부인의 생존전략
가짜 남편 만들기, 1564년 백씨 부인의 생존전략
  • 이지원
  • 승인 2021.09.02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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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80쪽

성性ㆍ적통ㆍ재산ㆍ신분 상승 … 욕망의 도가니

역사가의 눈으로 파헤친 ‘사기극’

 

16세기 프랑스에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마르탱 게르 사건’이 있다. 8년간 가출했다 돌아온 남편이 아내와 가족, 주변 사람들을 속여오다 진짜 남편의 등장하면서 재판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수백 년 동안 영화ㆍ소설ㆍ오페라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왔다. 이 사건(재판)의 핵심은 천재적 사기꾼의 행각이지만 마르탱의 아내 베르트랑드가 ‘먼저 돌아온 남편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하는 점도 색다른 독법을 제시한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 ‘가짜 남편’ 사건이 있었다. 대구 사족 유연이 1558년 가출하면서 벌어지는 이 사건 역시 6명의 무고한 죽음을 낳으면서 당대의 화제가 되었다. 이를 다룬 이항복의 〈유연전〉이 국문학계에서 나름 관심거리가 되어, 대학입시용 논술자료로도 활용될 정도이다. 

이 책 『가짜 남편 만들기, 1564년 백씨 부인의 생존전략』은 꼼꼼한 사료 읽기를 바탕으로 사건의 전말을 추적하면서 당대의 기록과 제도 대신 인간의 욕망을 축으로 문학이 ‘은폐’한 역사를 보여준다.

 

소설보다 흥미로운 사건 전말

1558년 대구의 사족 유유가 집을 나간다. 4년 뒤인 1562년 채응규라는 자가 유유를 자칭하고 나타났다. 1564년 유유의 동생 유연이 가짜임을 눈치채고 그를 대구부에 고소했으나 진위를 가리는 도중 채응규는 자취를 감춘다. 그러자 유유의 아내 백씨가 적장자의 지위와 봉사권 그리고 토지를 빼앗기 위해 유연이 형(채응규)을 살해했다고 고소한다. 유연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거짓 자백을 했고 사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15년 뒤인 1579년에 진짜 유유가 나타나 재조사가 시작되었고 채응규는 곧바로 체포된다. 그런데 채응규는 서울로 이송되던 도중 자살하자 이번엔 유유 형제의 자부 이제가 처가 재산을 노려 채응규를 교사한 범인으로 지목된다. 결국 이제는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면서 사건은 21년 만에 종결되고 만다.

 

꼼꼼한 사료 분석, 논리정연한 추리

저자는 〈유연전〉과, 이와 상충되는 권득기의 〈이생송원록〉을 교차분석하여 문학작품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며 이제의 누명을 벗기고 백씨 부인이 사기극의 진정한 기획자임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채응규가 진짜 남편임을 주장하는 확실한 근거인 유유 부부의 첫날밤 일, 백씨 부인의 신체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제가 평소 재물에 담박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제시하는 한편 당대 법제를 들어 사기극이 성공했더라도 그가 처가 재산을 받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했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제에게는 범행 동기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사건의 단초가 되는 유유의 가출도 성적 문제에 기인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책의 뼈대가 되는 이항복, 권득기의 글을 두고 먼저 집필 배경을 짚어 사건의 이해를 돕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기록’이 말하지 않는 욕망 드러내기 

결국 이 사건은 피해자만 있지 가해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지은이는 〈유연전〉이 지목하는 ‘주범’ 이제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심문과 처형을 비껴간 백씨 부인의 동기에 주목한다. 그녀는 왜 시동생을 ‘가짜 남편’의 살해범으로 몰았을까. 남편도 자식도 없고, 가문의 후계자를 지명할 총부’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 채응규가 사기꾼임이 드러날 경우 간통 혹은 공모를 추궁당해야 하는 현실에 비추어 백씨 부인이 살아남기 위해 기획한 처절한 ‘생존전략’이란 것이 지은이의 시각이다. 여기에 무당ㆍ관속 출신 채응규의 신분 상승 욕망, 가부장제하에서 사족 남성의 성적 무능력과 조선 사법제도의 거듭된 허물을 감추기 위한 사족사회의 묵시적 동조가 더해져 스물일곱 살 젊은이 유연을 비롯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본다. 

 

저자는 방대한 한문 텍스트를 바탕으로 조선의 풍속사, 사회사 등을 포괄하는 다양한 저서를 펴내 학문적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얻은 한문학자이다. 이번 저서 역시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신선한 시각과 합리적 추론을 통해 조선 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보여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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